(小論) 사상은 법률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 중국법에서의 '친린법(親隣法)' 중국사관련

이웃분께서 '중국법제사에 있어서 사상이 법률에 미친 영향 문제'를 언급하셨기에 이 문제로 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추가멘트에서 로마법-게르만법 문제를 말씀해주시다보니, 저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름의 小論(?)을 덧붙여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상이 법률. 특히 물권법에 영향을 끼친 사례로서 주목할 만한 것 같습니다.

이에 포스팅을 감히 올려봅니다. 혹여 문제가 있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비판과 질정의 말씀 역시 부탁드립니다.  



1. 유교에서의 '개인'의 정의 

로마법에서의 개인의 물권(物權)행사는 그리스-로마사상에서의 개인에 대한 정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특히 근대법에서의 물권법은 데카르트 이래로의 근대사상에서의 개인의 정의. 즉 '절대적 개인'과 그렇게 '절대적인 개인이 보유한 권리'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개인의 정의가 개인의 물권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비슷한 맥락은 전근대 중국 법체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유가사상의 독특한 개인정의가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유가사상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는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이 사회에 정의되는 것 혹은 존재하는 것은 '절대적인 개인'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 개인이 사화적 관계와 우주적 질서와 어떤 연관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게 됩니다. 

때문에 유가의 논리에서 부모-가족과 향촌공동체가 중시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입니다. 부모-가족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대상이고, 농촌사회에서 농촌공동체의 협조와 부조는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논리에 따르면 개인의 내면적 선택과 신념의 체계는 존중되어도, 사회적 행동과 권리의 행사는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집단'에 의해서 제약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바로 물권법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법률적 권리에서 총체적으로 반영된다고 봅니다.



2. 물권법에서의 독특한 개념 - '친린법(親隣法)'의 존재

개인의 선택 자체를 중시하는 유가사상 답게, 부동산 및 동산의 매매권리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보장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정전제(井田制)가 실시되어 개인의 토지매매권이 제약될 것 같은 주대에서도 토지의 소유권 혹은 점유권에 대한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한대에서는 동중서가 '송곳 꽃을[入錐] 땅조차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런 현실이 벌어지는 이유로 호족들의 토지매매를 거론하고 있으니깐요. 

하지만 이렇게 토지 자체에 대한 매매는 자유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권리를 행사하는 개인은 자신이 연계하고 잇는 다른 사회적 맥락과 불가결하다는 유가의 논리 때문에, 독특한 개념이 탄생하게 됩니다. 즉 만일 토지-가옥 등과 같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대상을  매매해야 한다면 자신과 사회적 연계를 가지고 있는 집단(가족 및 친족, 향촌공동체의 이웃)을 우선으로 배려해야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친족(親)과 이웃(隣)에게 먼저 부동산을 매매하고, 그러고서도 안될 경우에 타인에게 부동산을 매매할 수 있다는 '친린법(親隣法)'의 발생이었습니다. 이러한 친린법의 개념은 일찍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존재하지만,1) 관행을 넘어서 법령으로 구체화되는 것은 당대(唐代)의 일로 보입니다. 


"천하 여러 군에서 도호(逃戶)의 전택(田宅)이 함부로 타인에 의해 없어져서 부세를 책임지는 자가 부족하게 되는데, 먼저 이를 친린(親隣)에게 매매함으로서 그에게 되돌려주어서 의투(依投)하는 바가 없게하라."

天下諸郡逃戶, 有田宅産業, 妄被人破除, 幷緣欠負租庸, 先已親隣賣買, 及其歸復, 無所依投.


- 『당회요(唐會要)』권85, 「도호(逃戶)」


이와 같은 당대의 법률에서의 친린법 개념의 설정과 시행논리는, 다시 송 초의 법률인 『송형통』에서도 반영되게 됩니다.2) 아래는 그러한 친린법의 시행개념을 보다 구체화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물업(物業)을 전당잡거나, 매매하거나, 의탁할 때에는 먼저 가까운 친척[房親]에게 묻고, 친척이 필요 없다고 하면 사방의 가까운 이웃[四隣]에게 묻고, 그도 필요없다고 하면 비로소 타인에게 거래 할 수 있다.

다만 친척이 가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면, 가격을 높게 쳐주는 곳과 거래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소유주[業主], 대리인이나 심부름꾼[牙人] 등이 친척과 이웃을 속여 계약서[契帖]내에 가격을 함부로 올리거나 함부로 숨긴 경우에는 속인 금액수와 정황의 경중을 참작하여 처분한다.

- 『송형통(宋刑通)』권 13, 「호혼(戶婚)」률, '전매지당논경물업문(典賣指當論競物業門)'


이처럼, 중국의 법제사에는 분명 유교사상이 영향을 미치면서, 민사법적 측면에서 개인의 권리라는 측면에 있어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내는 양상이 존재했었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권리에서 보았을 때 이런 친린법만한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예시로 들게 되는군요. ^^;;

물론 친린법의 설정은 비단 유교적 윤리의 반영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향촌공동체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니깐요.
농촌사회에서 수확과 개별 수입이 불안정한 가운데에서 농민들은 이미 공동납적 관행을 통해 부세부담을 공유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산이 매매된다면 친척 혹은 이웃과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우선적인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죠.

또한 비교적 균질한 구성원이 존재하는 농촌공동체 내부에, 이방인-외부자가 부동산 매매를 하고 그로서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여, 향촌공동체 내부의 운영과 내적 단결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막으려는 전근대 농촌공동체의 집단심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기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농촌공동체의 유지를 통해서 부세납부안정을 노리는 국가의 의도도 개입되었습니다.  



3. 친린법의 미래 : 그대로 시행되었을까?

이처럼 독특한 개념으로서의 친린법은 당대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송 초에 구체화되었습니다만.....불행히도 송이란 사회는 중국사회가 나름의 내부적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친린법이 송 초에 당의 법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시행에 있어서는 파행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남송시대의 『명공서판청명집(名公書判淸明集)』단계에 오면 친린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대상이, 親 혹은 隣 한쪽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親과 隣  양쪽에 속해야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법조문만 본다면 친린법이 더욱 엄격해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사실상의 사문화를 뜻했습니다.3)

왜냐면 '친척이면서도 이웃에 거주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사실상 친린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제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죠. 이는 친족이라 해도 지역 간 거주이동이 활발해지고 경제적 관계가 우선되어 갔던 송대의 양상에서, 국가가 명시적으로 '유교적 이념'을 우선시한다면서도 현실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된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이러한 친린법조차도 존재는 하지만, 결국 그 우선순위가 토지와 가옥을 저당잡고 있는 이[典主]에게 우선시되고, 그 다음이 친린권자로 배정되는 양상이 나타나죠.4) 이처럼 경제적 관계가 우선됨에 따라서 친린법은 차츰 그 효력이 상실되어 갔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순의 분기점에서,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도 유학 내부에서 분화되어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종래의 질서를 회복하기를 바라던 이학(理學)자들과, 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경세(經世)론자들이 분화되고, 다시 그렇게 분화된 이들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교류하는 상황이 형성되었으니깐요.

송대 이후의 유학과 법률운영은 바로 이런 양상에서 출발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덧 : 화요일 쯤에나 다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웹하드를 보니 일전에 떡밥춘추 3호 기재글을 쓰면서 친린법 개념을 참고하려 봤던 자료들이 있더군요. 이에 집에서나마 급한대로(...) 참고하여 쓰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떡춘을 보신 분들께서는 굳이 새로운 논의라 할 수 없는 글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덧 2 : 역시나 사상관련 책들이 연구실에 있어서 그런지, '유학에서의 개인개념'에 관한 부분이 별다른 레퍼런스가 없이 평소의 제 지론과 개설서에서 간략하게 요약하는 사항 정도로나 쓰인게 마음에 걸립니다. 이에 제현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주석과 참고문헌

나폴레옹 전쟁시기 한 '여성장교'이야기. 역사잡상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플린트락 머스킷'에 대해서는 여러분들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며 저 역시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 지인들이 "나폴레옹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 같은데, 여성장교의 존재는 좀 엄한거 아니냐."는 제기도 종종하더군요. ㅎㅎ 

이에 저 자신은 '실제 나폴레옹 시대의 여성장교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그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도 감히 풀어놓아보고자 합니다. 때문에 혹여 여성사를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분. 그리고 길고 지루한 글을 싫어하시는 분들(....)께서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   



1. 전근대 군대, 근대로의 이행을 앞두고.

알렉산더 대왕에서부터 발렌슈타인의 군대에 이르기까지, 전근대 유럽의 군대는 복합다난한 조직이었습니다. 군대 행렬은 물론 편제의 구성이 비단 '전투원 남자'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으며, 전투원-비전투원의 삶이 크게 구분된 것도 아니었었죠. 때문에  군대가 움직인다는 것은 군대에 생계를 의존하는 혹은 이익을 노리는 인력이 뒤섞여 복잡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우르스 그라프, 「란츠크네히트 용병과 소녀」 
종군여성으로 추정되는 소녀의 허리춤에 달린 화약주머니와 단검을 주목할 만합니다.

 

그런데 30년 전쟁을 전후하여 유럽의 군대에는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마우리츠 대공에 의해 시작된 '근대적 군사개혁'의 조류는 강력한 훈련(drill)과 병영생활을 요구했으며, 이는 점차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삶을 분리하는 시초를 마련하였던 것이죠. 이는 18세기 절대왕정의 강화와 상비군 체제의 설립과 함께 '군인'을 일반 세계에서 격리시켜나가는 추세 속에서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화'가 모든 나라에서 균일하게 시행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일한 군복을 적용시키려는 노력조차도 비교적 더디게 이루어졌으며,1) 하물며 병영에서의 비전투원의 축출(?)과 병영생활과 일반생활의 구분은 더욱 더뎠던 것이죠.

실제로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병사들은 가족들과 병영에서 잡거하는 경우가 상당했고, 프랑스의 경우 오히려 병영의 군인들이 도시문화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었던 탓에 이들이 대혁명의 이상에 공감하여 합류하는 일이 벌어졌으며,2) 심지어는 프랑스군 내에 여성 군속의 존재를 비방디에르, 칸티니에르라는 이름으로 19세기 후반까지 존속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한 시기는, 근대적 군대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전근대 군대의 특성 역시 완벽하게 극복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군내 여성의 존재나 병영과 일상의 분리라는 점에서는 더욱 더 말이죠. 바로 이러한 전근대적 군대의 특성이 극복되지 못한, 이러한 '간극'에서 우리의 이야기에서 다룰 주인공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2. 주인공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결단 

1782년경,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지방에서는 두 남녀가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마을에서 소문난 미녀였던 알렉산드로비체바가 사랑하는 하급귀족 기병장교인 두로프와 함께 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도망쳤던 것이었죠.
하지만 가정을 이룬 후 알렉산드로비체바 역시 자신의 결혼이 '축복받은 결혼'이 되기를 바랬고, 그녀는 아들을 낳아 아버지에게 외손자를 안겨주어 용서를 받음으로써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머지않아 임신을 했고 1783년에는 곧 자식을 출산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태어난 자식은 딸이었고, 그녀가 바로 이번 이야기에서 다룰 주인공인 나데즈나 안드레예브나 두로바(Надежда Андреевна Дурова)였습니다. 
정작 그녀의 아버지는 딸을 낳았지만 외손주를 봤다는 기쁨에 그녀를 용서해주었음에도, 두로바에 대한 알렉산드로비체바의 실망감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졌죠. 

두로바가 생후 4개월밖에 되지 않던 날, 어머니는 계속 크게 울어데는 딸에게 짜증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울어제끼는 딸을 번쩍 들어 창문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어린 아가가 창문 밖에 던져졌으니 살아남을 리는 없고, 이렇게 이야기는 끝납니.......는 아니고. (...)

근처에 있던 남편의 연대 소속 부하였던 아스타호프라는 병사가 창문에서 떨어지는 아기를 받아내어 아기는 기적적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그대로 두었다간 사단이 나리라고 생각하여 부하에게 그대로 연대에서 아이를 기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사랑과 거리가 먼 그녀였고, 자연스럽게 승마술은 물론 군대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갔습니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가 통솔했던 연대인 코삭 경기병대는 러시아에서도 자유분방한 군대였으니 그 분위기를 듬뿍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죠. 
더욱이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그녀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녀를 아들처럼 대하고 원하는 말과 무기를 사주면서 딸의 취향을 취존중(?)해주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던 그녀는 1789년에 7살이 되자 어머니의 손에서 다시 양육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교육에는 여전히 사랑이 없었고, 단지 딸의 시집을 대비한 '소양'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한편 재미있게도 그녀의 회고에 따르자면, 어머니는 그렇게 딸을 가르치면서도 "여성이란 영원한 노예상태가 운명일 수밖에 없다."는 자조섞인 푸념과 폭력적 섹스에 대한 혐오를 그녀의 딸에게 토로하곤 했었죠.

이처럼 사랑없는 교육 속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정숙함', 그리고 어머니의 이러한 자탄을 들으며 그녀는 자연스럽게 자유로웠던 군대 생활과, 러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인지에 대해 깨달아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녀의 부모가 그녀가 아들이기를 은연중에 바라던 심리를 잘 알고 있었고, '남자 못지 않은 남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처녀시절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


1801년, 그녀는 마침내 집안에서 정해준대로 아버지가 시장으로 있던 지역의 체르노프라는 하급관료와 결혼했고, 심지어는 1803년에 이반이라는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하지만 남편과의 생활은 불화의 연속이었고 결국 그녀에게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806년, 그녀의 거주지였던 사라풀에 주둔하던 돈 코사크 연대가 다른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자, 그녀는 머리카락을 자르고 미리 구해둔 돈 코사크 연대의 복장을 입고는 아는 사람을 통해 섞여들어감으로서 가정을 탈출했습니다.  



3. 군대로의 입대. 그리고 참전과 영광의 시간 

"하늘로부터 온 고귀한 선물인 자유는 마침내 영원히 내 운명이 되었다. 나는 자유를 호흡하고 즐기고, 마음과 가슴으로 자유를 느낀다. 내 존재에 자유가 스며들어 있으며 자유는 나를 활기차게 한다! (중략) 나는 이제 "계집애야. 앉아있거라. 여자애가 혼자 쏘다니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란다."라는 말 따위를 내 평생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상상하면서 기뻐 날뛰었다."

이처럼 자유를 찾기 위해  군대를 선택한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성장환경이라는 특수성에서 기인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녀의 사례가 그 시대의 '유일무이한 사례'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유를 찾고자 하는 여성들은 정체를 숨기고 남장을 한 채 군대로 잡입(?)하는 것은 서유럽 국가들에서도 존재하는 일이었습니다.3)

각설하고, 그녀가 따라나선 코사크 기병대는 비정규군으로서 수입도 불안정했고, 그녀 역시 정규군에서 인정받는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격변하는 국제정세는 그런 그녀에게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원래 당시 러시아 정규군은 첩자와 불순분자의 난입을 막기 위해, 보병의 경우 해당 지역의 지주-귀족으로부터 보증받는 농민-농노들을 징집하였고, 기병 역시 귀족 혈통 증명서를 바탕으로 징집하는 체제로 이루어졌었습니다. 하지만 아우스터리츠 전투 이후로 거듭되는 패배와 인력손실로 인해 러시아군은 인력부족을 호소하고 있었고,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은 부대 중에는 러시아군에서도 몇 안되는 모병부대인 폴란드 기병연대가 있었습니다.
 
목구멍에서 손이 튀어나올 형편이던 이들 폴란드 기병연대는 두로바의 간단한 거짓 이력을 증명서 없이 인정하고 정식 군인으로의 입대를 허용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807년에 구트슈타트 전투에 처음으로 참전하게 되었죠. 

군대에 입대한 이후의 초상화.


첫 참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데뷔전은 나쁘진 않았습니다. 회고록에서 밝히듯이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도 두려워하는 그녀였지만, 전투 중에 낙마한 아군의 장교를 프랑스 기병들이 죽이려는 것을 보고, 이에 단기로 용감히 돌진하여(!) 프랑스 기병들을 쫓아버리고 동료를 구했다는 영광을 얻은 것이었습니다. 

전투전우집단의 특성 상 이러한 수훈은 그녀가 의심없이 동료로서 인정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녀를 이제 동료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어떤 의심과 불신을 드러내지 않고 전장을 함께하게 되었죠. 그녀는 하일스베르크와 아일라우의 끔찍한 전투에서도 살아남았으며, 틸지트 조약으로 러-프관계가 소강상태로 들어서는 것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으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소상히 밝힌 편지가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즉각 자신의 딸이 여자임을 밝히고 군 복무를 그만두게 하기를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에게 청원했고, 차르는 그녀를 결국 수도로 소환하여 접견하겠다고 밝힌 것이었죠. 
1807년, 수도로 소환된 그녀에게 차르는 그간의 공을 치하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대담하게도 황제의 명령을 간곡히 거절하는 행동을 택합니다. 


(나는) "저는 폐하를 위해 제 생명을 희생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차르의 무릎을 안고 울었다. 이에 차르는 감동하여 말하기를 "그럼 자네는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물으셨다. 나는 "무사가 되는 것입니다!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폐하께서 제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상입니다! 다른 것은 제게 필요 없습니다! (하략)"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간곡한 부탁에 차르는 그녀에게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장교로 진급시키면서 "알렉산드로프"라는 이름을 따로 하사했습니다. 그리고 아군을 구한 행동을 칭찬하며 성 게오르기우스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죠. 이처럼 차르의 허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인정까지 받았으니 '자유'와 '영광'이라는 모든 것이 주어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동료들에게 돌아가 평범한 한명의 군인으로서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틸지트 조약이 파기되고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게 되자 그녀 역시 전투에 다시 참전하게 되었고 미르, 다쉬코바, 스몰렌스크 전투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쉐바르디노 전투에서는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부상이 채 아물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계속 참전하여, 당시의 '유럽 최대의 살육전'으로 불리는 보로디노 전투에 참여했고, 역시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의 군대생활은 1815년에 종막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공식 사유는 병가 제대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의 연로함을 이유로 딸에게 돌아오도록 부탁했던 것이었죠.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가 "활동으로 끓어오른 생활"이라고 표현했던 군대생활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 망각과 갈등의 시간 - 성 정체성의 문제와 함께  

아버지의 거주지인 사라풀로 돌아온 그녀는, 그곳의 시장인 남동생의 집에서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여성임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차르와의 접견 이래로 그녀가 여성이라는 소문은 어느 정도 널리 퍼져있었고, 사람들은 여성의 몸임에도 군대에서 종군해 차르에게 인정받은 그녀를 신기해했던 것이었죠. 
처음에는 고향 뿐만 아니라 수도의 사람들도 그녀를 보고 싶어하면서 사교계의 명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교계의 명사가 되었다 해도 자신이 해오던 바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습니다. 즉 그들이 그녀에게 '여성'으로 바랬던 것을 거절했던 것이었습니다. 

즉 비록 치마는 입었지만 검정색의 화려하지 않은 그리고 남자용 상의를 차려입고, 긴 담뱃대를 피며 다리를 꼬고 앉으며, (...) 오히려 남성보다도 남성같이 구는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죠. 
과거 장교시절에 이러한 행동은 그녀가 정말 남자인 줄로 안 어느 여성의 구애공세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정숙함, 그리고 여자다움을 요구하던 수도의 사교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비춰질 뿐이었고, 그녀가 괴짜로 간주되면서 무시당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교계에서 무시된 그녀는 사라풀에서 아들 이반과 지내며 떠돌이 개와 고양이들을 키우며 조용히 여생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남성다운 행동을 계속 하고 있었고, 아들 이반을 사랑했지만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지는 못하게 할 정도였죠. 

노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이처럼 그녀가 왜 스스로를 남성성을 가진 존재로 현현해야 했을까요? 이는 우선적으로 그녀의 부모가 그녀가 아들이기를 바랬던 것에 대한 일종의 심리기제에서 연원된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습니다.

즉, 두로바가 부딪친 문제는 후일 조르주 상드 등이 부딪친 문제. 즉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여성으로서 남성에게 약하게 보이지 않고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남성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 '차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래는 바로 두로바 역시 그러한 의식에서 남성성을 드러낸 것임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회고입니다.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는 약해지는 상태를 매우 두려워한다. 나는 나중에 과중한 업무수행 때문이 아니라, 나의 성별이 가진 허약함 때문에 약해진 것이라고 간주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처럼 그녀 스스로가 남성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죠.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여성성을 가진 존재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그것을 즐기거나 현실에서 여성성이 더 유용할 수 있음을 깨닫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느날 날뛰는 말을 제어하기 위해서 말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는 스스로가 '여자답지 못하다.'라고 후회하기도 했으며, 다른 여성들의 옷차림새와 아름다움을 비교하면서 이를 일기에 적기도 하였죠.
심지어는 군대의 경험에서조차 남성 동료들처럼 강압적인 방식으로 마초(馬草)를 구하던 것이 잘 안되자, 여성스럽게 부드럽고 부탁하는 방식으로 주민의 협조를 얻어내어 마초를 더 많이 모을 수 있었던 것을 기록하면서 자신이 가진 여성성이 때로는 더 나을 수 있음을 자각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남성성'과 '여성성'의 문제에서 고민하고 있었음에도, 주목할만한 것은 그녀가 스스로 여성임을 잊지는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수기를 '아마존의 수기'라고 할 정도로 스스로를 '여전사'로서 인식하고 있었고, 다음과 같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시대에 자신의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료해하는 여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부적절한 인물이다! 행동하며 노동하고 여성들 주위에서 발생하는 대사건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공감하며 기여할 수 있는 여성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필요하다." 

..라고 인식하고 있던 것이었죠. 그녀의 이러한 외침은 곧 그녀 뿐만이 아니라 곧 이후 시대의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로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러시아 사회에서 그녀는 '괴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866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녀는 알렉산드로프의 이름으로 매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지만, 성직자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기억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녀를 최소한 군인의 예로서 안장하기를 요구했고, 이에 그녀가 바라던 이름대로는 아니었지만 군장의 예로서 매장되었습니다.      


* 덧 1 : 迪倫님과 Aydin님의 지적 덕분에, 인명 병기에서의 치명적인 오류를 수정할 수 있었습니다. 두분의 지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결어 & 주석 & 참고문헌

책 추천 :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역사잡상



"사물의 기원에 대해 이해하는 자는, 그에 대해서 명쾌한 의견을 가질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나가하라 게이지 저, 하종문 역,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삼천리, 2011.



좋든 싫든간에, 한국의 역사학은 일본의 역사학 전개와 깊은 연관을 맺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비단 식민지 시대의 영향을 언급할 필요가 없이, 해방 후 역사학의 방향과 주요한 방법론, 논의 등이 일본 역사학의 논의와 깊은 연관을 맺어왔기 때문이죠. 

(특히 경제사학자 가운데에서 '대총사학'으로 불리던 오오츠카 히사오의 연구, 사상사학자 중에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연구를 의식하지 않는 분은 거의 없을 것이며, 또한 사회구성체론 논쟁 역시 일본에서의 지적 흐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중요성은 일찍부터 인지되어 왔기 때문에, 이 분야에 있어서 많은 량서들이 번역되어 소개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는 일본 동양학(역사학을 포함)의 기원을 해부한 스테판 다나카의 『일본 동양학의 구조』와, 나카노 도시오의 『오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 윤해동 외 『역사학의 세기』등이 있죠. 

하지만 해당 책들은 미시적으로 해당 주제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일본 역사학 전반의 흐름에 대한 쉬운 이해가 다소 어려울 수 있고, 또한 그에 따른 한국 역사학에의 영향을 추측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2004년에 출간된 『20세기 일본의 역사학』이 2011년에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책의 저자인 나가하라 게이지(永原慶二)는 일본 중세사의 권위자이자 원로학자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기도 하죠. 이에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난잡하게나마 풀어보려 합니다.



1. 간단명료함

저자는 일반적인 통사의 구성과 다르게 특정 역사학의 조류를 바탕으로 그에 관련된 연구 성향을 서술하기보다는, 대표적인 개별 역사가를 주요 설명 단위로 설정하고 그에 맞추어 설명을 해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성이 개별 인물을 중심으로 한 파편화된 설명으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이 어떠한 역사적 상황과 논리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설명을 빼놓지 않고 있죠.1) 
어찌 본다면 개별 인물의 측면에서 이들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어떻게 영향을 받고 관계를 맺어나갔는지를 보다 직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서술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할 만한 것은 개별 인물들의 사학적 성향에 대한 인상비평, 평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들이 사학적 목적을 위해 어떤 방법론과 연구소재를 선택하는지를 간결하게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 사학 역시 일본 사학적 논의에서 어떤 논의와 연구방법을 의식해왔는지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2)

마지막으로 저자가 후기에서 스스로  "20세기에 산 한 사람의 역사연구자로서 (그 시대의) 체험과 사고방식을 21세기에 역사를 공부하고 있느 젊은 독자에게 전하고자"한다는 말에 걸맞게......
전술한 문제들을 담백하게 서술해내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사학사적 전개 뿐만 아니라, 간결하게나마 사료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분야에 대한 서술을 첨부하고, 이마이의 '일본 사학사 주요 사건 연표'를 덧붙이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죠. 

이처럼 담백하게 후학들을 위한 주요 정보를 간단명료한 전개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을 주요한 강점으로 꼽고 싶습니다.



2. 단호함

하지만 담백한 서술을 택한다는 것이 결코 기계적인 중립성을 의도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개별 역사학자들을 각 시대의 조류에 연결지어 서술한다는 점에서 느끼셨겠지만, 역사학자들이 그 시대에 연계되어 어떤 의식을 가졌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극복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 스스로도 얘기하듯이, 이 책은 교과서 파동 등을 중심으로 한 극우계열의 역사왜곡에 대응하여, 일본 역사학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집필된 책이기도 합니다. 이에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본 대표적인 구절 하나를 인용해볼까 합니다.


자국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자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양새를 규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비판정신이 빠진 '밝은 역사' 따위는 존재할 수가 없다. 원래 역사인식은 역사에 대한 비판정신에 의해 성립된다.
각각의 시대 상황이나 당시의 사고 형태에 대한 이해는 꼭 필요한 작업이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일과 긍정하는 일은 별개다.

"자국사를 밝게 써라."라고 할 경우, 본디 역사에서 '밝다'는 어떤 것이고, '어둡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지조차 모호한 채, 막연히 '자신감'(그 무렵 일본에는 "Japan as No.1"이나, "Look East" 같은 말이 유행했다.)이나 애매한 내셔널한 감정으로 역사인식이나 역사교육을 거론하거나 좌우하는 경우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그것은 역사학에 대한 경멸로 이어진다.

-  '이에나가 소송'에 대한 나가하라 게이지의 평, 나가하라 게이지,『20세기 일본의 역사학』, 218~219쪽.
 


해당 글은 '후쇼샤 교과서'+'지유샤 교과서' 문제가 아닌 '이에나가 소송'에 관한 글이긴 하지만, 이만큼 '후쇼샤 교과서'+'지유샤 교과서'를 포함한 내셔널리즘적 시도에, 그리고 역사학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려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 주변의 상황에도 유효한  날카로운 한마디가 따로 없을 것입니다.  

저자 스스로도 서문과 종언, 그리고 내용 중간중간마다 강조하고 있듯이,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화적 시각에서의 역사서술, 중세에 대한 무책임한 낭만주의적 견해와 파악 등을 경계하는 단호한 멘트들과 함께, 그를 바탕으로 해당 시대의 역사학이 이런 문제들과 어떻게 연관을 맺어왔는가를 보여주는 것도 책의 강력한 매력입니다. 



3. 기타 첨언 

이외에도 책은 파격(?)으로서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간 통설적인 일본의 역사학이 서구근대화에 성공한 자신들의 위치를 강조해오면서 자국의 사학사를 고쿠가쿠(국학) -> 서구 근대사학의 이행으로 설명해오던 것에 비하여, 한학계(즉 유교적 합리주의와 청의 고증사학)의 인식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당당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죠. 

또한 일본의 최신 연구 성향 특히 주류 역사학에 비판적인 조류에 대한 서술도 상당부분 할애되는데, 일례로 지방사, 여성사, 피차별 부락민과 같은 '주변부' 역사연구의 연원을 1945년까지 거슬러 추적하며 이를 서술하는 것과 더불어, 류큐사(오키나와)사, 북방사(홋카이도, 아이누, 에미시) 등의 연구성향 역시 충실하게 반영해주고 있죠. (더군다나 저자가 1920년대 생임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_-;;)

사실 이러한 장점만은 아니더라도, 비단 2차세계대전 이전의 시기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학이 우리 역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개설서조차 제대로 번역된 것이 없는 우리 현실에서, 오히려 전후의 역사학을 적극적으로 조명해주는 해당 저서의 존재는 이미 그 자체로도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ㅠ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 책도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단호함'이라고 표현된 부분은 오히려 '주관적'으로 읽힐 분들이 있을 것이고,  특히 나가하라 게이지 스스로가 일종의 '진보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있다는 점은, 특정 정치계열에 속하는 분들에게는 불쾌감을 유발할 수도 있겠죠. 

다만 일례를 다시 들자면, 나가하라 게이지는 대표적인 중세 연구자 중 한명인 아미노 요시히코를 10여 페이지에 걸쳐서 비판하면서.......
아니! 나의 완소 아미노 선생을 10여페이지에 걸쳐 비판하다니! 우리 옵하(?)까지 말라능 뿌우~뿌우~ (/'ㅅ')/ 

그의 사학이 중세에 대한 '본원적 자유'를 강조함으로서 중세에 대한 낭만주의적 경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고 맹비판하지만, 동시에 그의 사학이 다양한 계층을 발굴해내고 일국사적 관점을 해체했다는 점 역시 공정하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사상적 지향이 다른 분들께도 이런 공정함(?)이면 소개할 만한 책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사실 나의 완소 아미노 선생을 무자비하게 깠는데도 추천할 수밖에 없는 심정으로 이렇게 추천합니다. 어흑 ㅠ 

다만 이것도 저의 지나친 과욕(?)이라면, 이 책은 여러분께서 20세기 일본 사학사에 대한 최소한의 간결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추천 정도만 덧붙이고자 합니다.  

결국 우리 역사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시려는 분은, 그만큼 우리 역사학의 주요한 기원 중 하나인 일본 역사학의 전개를 이해했을 때 보다 정치하고 명쾌한 이해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마음에서 이 책을 감히 추천해봅니다.




덧  1 : 이 책을 연합뉴스에서 이례적으로 소개해주었는데, 문제는 다양한 분야를 조명해주고 있는 이런 좋은 책을 어떻게 단지 "일본의 역사왜곡을 역사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라는 하나의 프레임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_-;; 정말 '안타까운' 서평 중 하나일 듯.

덧 2 : 개인적으로 저의 서평이 너무 난잡하다 생각하시는 분께서는, 박진한 선생님께서 『일본역사연구』19권 (2004)에 실은 서평을 참고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ㅎㅎ

덧 3 : 한 제현분의 지적이 있어 부기합니다.  해당 책이 설정하고 있는 주요 개념('15년 전쟁' 등과 같은)은 아직 사학사적 논쟁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으로 사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하시는군요. 이에 지적에 감사드리며 다른 제현분들께도 책의 공정성을 판별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고자 하여 부기합니다.  


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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