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명록 및 블로그 운영에 관한 제언

방명록

누추한 본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현들께서 왕림해주시고 기타 좋은 말씀들을 남겨주시는 것을 환영합니다.

본 블로그는 다음과 같은 방침으로 운영됩니다.

1. 비로그인이라도 리플을 다시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다만 무례한 행동과 언사는 자제하여 주십시오.

2. 제가 아직 이글루에 익숙치 않은 관계로 트렉벡과 핑벡조차 햇갈릴 정도입니다. 이에 혹여 트렉벡이나 핑벡으로 의견을 남겨주신 분들께서는 반응이 느려도 양해하여 주십시오.

3. 본 블로그는 반교권주의, 반NL, 반유사역사학을 표방합니다. 때문에 교권주의적, NL적, 유사역사학에 관련된 분들에게는 인간 이하의 예우로 대할것을 미리 표방합니다.

본 블로그를 찾아주신 분들께 무한한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




by 들꽃향기 | 2009/12/31 23:59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20)

현대의 신라부흥운동

어린시절 만화라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한 철인 28호.
하지만 그것이 한 고대 왕국과 관련된 처절한 기억과 투쟁의 역사와 얽혀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을 한순간에 저편에서 끄집어낼 강력한 진실이 발견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러한것......








1193년, 김사미와 효심이 가혹한 무인정권의 수탈과 고려에 대항하여 신라를 부흥하고자 궐기하였다가 스러져 간 이래...결코 신라를 부흥하고자 하는 우국의 지사들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었나....ㄷㄷ
 
그러고보니 정약용이 비기를 어느 산 불상의 배꼽에 숨기고 사회변혁을 꿈꾸었는데,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이 이를 꺼내보고 궐기를 결심했다는 일화1)도 있는 만큼,

어쩌면 김사미와 효심이 최후의 희망을 담아 철인의 설계도를 삼봉산 자락에 숨겼던 것일지도.....(...)


주 1) : 해당 정보는 『강진읍지』에 실렸고, 그 때문에 동학군 토벌 후 조정이 정약용의 책을 불태웠다는 얘기까지 친절하게 기재되어 있다. 한때 민중사학의 전성시대에는 거의 사실에 가갑게 받아들여졌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전설일 뿐 ㄷㄷ  

by 들꽃향기 | 2009/11/28 21:56 | 역사잡상 | 트랙백 | 덧글(15)

송대 경제사 연구의 문제점 - 2

쩝..... 후속편을 뒤늦게 올리게 되었군요;; 몇권의 책을 더 읽고 확인한 후 리보중의 책을 중심으로 사항을 정리하려고 했는데...책 몇권이 아주 행불도서로 처리되어 대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별수 없이 리보중의 '중국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을 요약하는 성격이 강해질 듯 합니다. 이에 제현들께 사과의 말씀을 미리 올립니다. 부족한 점이나 틀린점, 잘못 파악한 점 등이 있다면 기탄없는 비판과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1. 송대 경제 발전의 기본논거 - 강남 농업혁명 - 은 기하급수적 성장규모였는가? 

 송대의 경제 발전을 논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전제는 바로 농업분야에서의 비약적인 발전입니다. 즉 서구의 산업혁명을 설명하는 주요 전제로서 카롤링 르네상스 하에서의 농업혁명과, 18~19세기 사포제 하에서의 농업혁명이 전제가 되듯이, 이러한 강남의 농업발전은 당시의 경제발전을 설명하는 주요한 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사 교과서에서도 기재되는 이러한 강남의 농업 발전의 원인으로 주로 지목되는 것은, 
 

① 우전(위전)의 개발로 인한 농지규모의 확대

② 점성도의 도입으로 인한 신품종 도입

③ 누도(樓道)의 『경직도(耕織圖)』에서 등장한 강동쟁기(江東犁 : 바퀴달린 쟁기)와 시비법과 같은 농법의 발달  

④ 집약농업으로 인한 전반적인 농업생산량의 향상  

 
 이러한 전제들이 당시 송대의 농업생산량의 증가를 설명하는 주요한 논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맥락 하에서 송대사 연구자들이 도출한 송대의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1편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소주지역을 중심으로 했을 때 당(唐) 시기에 1무 당 1석에 지나지 않고, 명~청대에도 2석 가량에 지나지 않던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송대의 경우에는 연구자들에 따라 2.5석~6석까지 높게 책정되는 양상에 있었습니다.   


  기술발전론과 각종 자료의 평균 통계 분석을 통한 이러한 연구는 가시적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틀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세부 논리로 들어가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연구사 방법의 문제 - 선정법(選定法)과 집수법(集數法)의 문제.

 
 우선 '선정법(選定法)'이란 사료 가운데에서 사가 자신이 판단하기에 가신성이 높은 자료를 뽑아서 그를 바탕으로 당시의 전반적인 추세를 추론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송대 강남의 생산량이 타 시대에 비해 높게 나오는 연구는 대체로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선정법을 채택한 논리는 대체로 초기 교토학파의 연구자들과 치샤(漆狹), 가오스더(高斯得), 구지전(顧吉辰)의 연구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송사』 식화지나, 『통지』, 『문헌통고』등의 정사류나 그에 준하는 사료의 검토를 통해, 치샤의 경우는 「영국부권농문(寧國府勸農文)」에서 소주지역의 생산량을 5~6석으로, 구지전의 경우는 『오중수리서(吳中水利書)』에서 소주의 생산량을 4석으로 언급한 부분을 중심으로, 당시의 단위면적 당 생산량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 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야자키가 선택한 사례는 대체로 국가의 총론적 통계와 성향을 반영할뿐 당시 지역의 농업생산량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파악하기는 힘든 측면이 존재하고, 동시에 치샤와 구지전의 경우는 '정말로' 바로 위에 언급한 사료 이외의 다른 사료를 제시하지 못한 체, 사료 하나에서 나온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즉 사료에서 제시되는 일부의 양상을 가지고 송대 강남의 전반적인 농업생산량을 가늠하는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죠.
 

(선정법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1980년대 소주지역의 무 당 생산량은 송대의 단위로 환산하였을때 4~5석 가량이 되는데 이러한 선정법의 최고치. 즉 송대 강남의 1무 당 생산량이 5~6석이라는 수치를 받아들이면 비료와 기계화가 이루어진 현대의 생산량보다도 송대의 생산량이 110~150%가량 높다는 수치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상식적인 것인지는 독자 제현의 판단에 맡깁니다.)

 
 이러한 '선정법'이 가지는 연구사적 문제점은 비교적 빨리 알려진 편이어서, 스도우 요시유키(周藤吉之), 민종티엔(閔宗殿) 등의 연구자는 '집수법(集數法)'을 통해 이러한 허상을 부를 수 있는 문제를 극복하고자 합니다. 집수법이란 하나의 자료를 그대로 믿지 않고 최대한의 자료를 끌어모은 다음 그 자료 중에서 최소치와 최대치 기록은 지나친 평가로 제하고, 나머지 자료 중에서 평균값을 구해 전반적인 추세를 가늠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연구방법에 의해 도출되는 송대 강남의 농업생산량은 1무 당 2~2.5석의 수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수법은 선정법 보다는 합리적이고, 추세적 성향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집수법 역시도 그러한 분석의 대상이 되는 사료들 간의 시대적-지역적 간극이 클 경우에는 실제로 큰 수치를 도출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실제로 한때 이러한 집수법을 사용하여 초기 연구에는 송대 강남지역의 1무당 생산을 2~3석으로 잡았던 시바 요시노부(斯波義信) 역시도 후속연구에서 시대적-지역적 격차가 크지 않은 '추수기' 자료인 「상숙현학전적비기(常熟縣學田籍碑記)」의 검토를 통해 소주 인근 상주의  1무 당 평균 생산량은 0.86~1.5석 사이라고 결론지은 바가 있습니다.

 
(이는 당시 학전은 중등급 이상의 토지였다는 점을 감안했을때, 다수의 토지의 생산량이 집수법에서 추산하는 양보다도 생산이 적었으리라는 점을 추론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통계와 수치의 검출에서 드러나는 선정법과 집수법의 문제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농지면적의 증가와 농업기술의 발전이라는 기본테제 자체가 '불균일한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3. 불균일적 발전  : 강남 델타 동부와 서부의 격차문제

 
 강남(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동부 지역)의 주요한 특색은 장강 하류에 위치한 지역이면서도 그 지형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즉 남경과 항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지역은 대체로 배수가 잘되는 완만한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반면에 소주 동부의 델타지역이나 항주 동쪽의 절동(浙東)지역은 배수가 잘 안되는 델타 습지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송대 당시에 개간이 강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지라도, 그 개간의 주요한 집중지역에는 수고의 차이와 거주성의 문제 때문에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남송 초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개간의 중심은 바로 완만한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즉 남송 시기 초까지만 해도 강남의 절반(그리고 명~청대에는 최고의 발전 지역이었던 강남 동부지역)은 미개간 상태로서 대지주 중심의 '조방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미개간지의 문제는 '농업기술의 발전'이라는 테제도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시사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강남 동부의 습지대에 우전을 만들어 경작지를 만든다 해도....이러한 습기가 다 빠지지 않은 토지에서는 오히려 점성도는 적응을 하지 못했고, 동시에 강동쟁기와 같은 유륜쟁기는 제대로 땅을 갈지 못하여 철탑(鐵搭)과 같은 구식의 쟁기가 오히려 효과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습기가 다 빠지지 못한 토지는 배수가 느려 농사절기를 맞추지 못했고, 더욱이 습지대와 경작지를 차단하고 습기가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해 논(혹은 밭)두둑을 두텁게 쌓아야 했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논의 크기를 축소시켜 소로 경작하지 못하는 문제까지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습지대의 경작지에서 습기가 어느 정도 빠지고 대부분의 습지가 경작된 것은 바로 명초의 일로서 실제로 이때부터 강동쟁기의 광범위한 보급과 우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누도(북송 중기)의 『경직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농법의 양상은 그가 지방관으로 재직했던 배수가 잘되는 절서(浙西)지역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였던 농법이지만, 강소성-절강성 동부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농법과는 다른 구식농법의 양상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경직도』에서는 퇴비의 이용을 이용한 발전된 시비법을 보여주고 있지만, 강소성 동부 델타지역의 자료인 『오군지(吳郡地 : 소주)』에서는 농민들이 퇴비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홍수와 범람시에 충적토가 쌓이는 것을 비료로 사용하였다고 서술하고 있죠.

 
 결국 강남 서부 구릉지대의 '조기 개발지역'에서 나타났던 양상을, 강남 전체로 확산시켜 보는 '선정법적 오류'가 지역적 격차를 무시한체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강남 동부의 농업형태 즉 '대지주 중심의 조방농업'은 이러한 기술의 도입에 적절하지 않은 형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조방농업 하에서 경작자보다 토지가 많은 현실에서는 굳이 집약적 생산과 기술의 발전을 시도할 추동력이 없고,

 대지주 중심의 농업 구조에서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어 안정적인 수취가 보장되는 현실에서 실패의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농법이나 품종의 도입 역시 동기가 없을 뿐더러, 그것을 도입하려는 경작자의 시도를 역으로 억제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니깐요.

 

 결국 당시 송대에 강남이 개발되어 어느 정도 절대적인 생산량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개발지가 경작지로서 제 기능을 하고 안정된 생산을 이룬 것은 바로 남송시기에서야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남송의 치세 내내 강남 동부지역의 군현의 수가 증가한 것은, 화북에서 쫓겨오고 증가한 인구가 이들 미개간지로 이동하고 그에 따라 개발이 진행된 결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송대의 경제발전에서 높게 평가해야할 것은 허상으로서의 '농업생산량의 증가'라는 명제보다는, 이러한 남송시대에 이루어진 강남 동부 델타지역의 개간에서 '국가조직이 수행한 역할'일 것입니다. 비록 송의 국가조직은 토호와 대지주의 토지 겸병을 막지는 못했고 실제로도 실패하였지만, 그래도 다수의 노력을 통해 자영농과 중소지주의 양성이 가능한 기반을 후대에 남겨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개간을 국가가 주도하여, 수리시설 이용권의 공공화와 규정으로의 보호, 개간비용의 보조와 개간시 소유권 보장, 지주가 함부로 전지를 확대하여 농민의 토지나 수리시설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하였으며,  

 
  임안으로의 남천 이후 종래 개봉까지의 운송비로 쓰이던 지방재정분을 중앙재정분으로 돌리지 않고, 지방재정분으로 그대로 두어 이러한 개간과 수리사업에 투자할 재원으로 운용하며, 마지막으로 공전법(公田法)을 시행하여 다수의 자영농과 경작자들을 국가의 관리 하에서 보존하도록 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 하에서 강남의 개발은 개간지의 확대 뿐만이 아니라 강남의 종래 사회구조를 바꾸는 성질의 것이었으며, 이러한 사회구조적 변혁의  틈새에서 중소지주와 자영농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영세한 토지의 효율을 올리기 위해 다양한 농법과 상품작물의 재배를 시도하는 '조방적'이 아닌 '집약적'인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명~청기 강남 발전의 주요한 기반이 되었던 것이며,  특히 명대의 관둔(官屯)과 그 관둔에 소속된 다수의 중소경작자들의 기반은 남송시대 공전법의 유산이라는 점은 그러한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는 사례일 것입니다. 

 


4. 왜 이런 문제가 나타났는가?

 
 이런 문제를 본다면 지금까지의 송대 강남 농업혁명이라는 것은 그 발전이 있을지라도, 그 추세에는 과장이 있거나 연구사적 방법이 문제가 존재했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결론 하에서 송대의 경제 발전이라는 것은 그 추세성은 인정하더라도, 그 절대적인 규모에 있어서는 명~청대나 현대를 능가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그러면 연구자들이 대중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었을까요? -_-;;

 
 우선 사료적인 문제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사료의 발굴과 보존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지만, 송대 강남의 발전론이라는 테제를 이끌어내던 당시(특히 1970~1980년대)에는 자료적 한계가 심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바 요시노부 역시 180개의 자료를 수집하였지만, 그 가운데서 북송시기를 대상으로 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사료는 30개 정도이고 그것도 시기와 지역적 격차가 상당하였다고 후술하고 있죠.

 
 더욱이 중국의 경우는 1960년대 문화혁명으로 학계와 자료 자체가 초토화되고, 일본과 한국, 미국 등의 학계는 냉전으로 인해 중국 현지의 자료에 접근하는데에 제한이 있었던 문제는 이러한 성향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특히 중국 해외의 연구자들은 이미 주어진 사료와 '몇 줄정도의 언급'에 의존하여 당시 시대의 추세를 가늠해야하는 장벽이 존재하였습니다.

 
 다만 연구자들의 '일종의 잘못'이 있다면 자신들의 역사관에 맞추어 원하는 사료를 선정하였다는 문제도 존재할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교토학파의 성향이 그러하였지만........그래도 그 정도는 문제가 크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중국의 경우가 문제인데, 이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논의가 결합하여 이러한 문제가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모택동이 '홍루몽 논쟁'을 제기하여 중국의 전근대에서도 이미 자본주의적 양상과 근대의 맹아가 나타나고 있었다고 본 이래,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적 단계 혹은 그 맹아가 만연해 있었다는 테제가 정론화되고(그를 통하여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은 봉건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함으로써, 맑스적 역사발전 법칙에 부합한다는 합리화를 위해) 

그에 따라 종래의 연구사에서 이미 '획기적인 시기'로 보았던  '송대의 경제발전'은 그들의 구미에 맞는 시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관변학자들이 송대의 경제발전에 근대적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다고 보면서 이를 경쟁적으로 분석함에 따라 송대의 생산량에 대한 추계와 가설은 나날이 갈수록 그 수치가 올라가고 심지어는 현대의 생산량과 발전도를 초월하게 되는 양상이 만들어진 것이죠.   
 

(이제 이 논리는 막장으로 치달아서, 당대 자본주의 맹아론, 한대 자본주의 맹아론 등이 중국의 관변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을 정도입니다-_-;;)
 

그러나 '허상'은 동시에 학계나 일반인들의 통념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통념'이 되었습니다. 때문에....졸자가 자신의 성과로 공부해내고 연구한 것이 아님에도, 이런 두서없는 연구사 정리글을 쓰게 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대사를 사랑한다면, 그 시대가 과장되서 평가받는 것 역시 '부당한 평가'로 보고 지적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때 '자본주의 맹아론'이 마치 학계의 정설로서 주장되던 한때의 우리학계를 생각하면, 우리 역사를 분석할때 이러한 송대사 연구에서 나타난 문제....즉 '허상이 실질을 압도하는 양상'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 참고한 주요 자료

탁용국, 「宋代 兩浙路의 農業發展에 關한 硏究 :宋史 食貨志를 中心으로」

리보중, 『중국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김영제, 『당송재정사』 

구로다 아키노부,『화폐시스템의 세계사』

신채식, 『송대사회경제사연구』

시바 요시노부, 『宋代江南經濟史의 硏究』 (일본어 치는 법을 몰라서리;;)

by 들꽃향기 | 2009/11/27 10:24 | 역사잡상 | 트랙백 | 덧글(4)

우리 블루닷 어린이의 꼬꼬마질.

(문제 해당 포스팅의 저자이신 leopord님의 글에 폐가 될까 하여 여기에 끄적임. 우리의 블루닷씨가 '어린이 떼쓰기'를 한 해당 포스팅의 링크는 http://leopord.egloos.com/4282873)


꼬꼬마의 애교 - 1.jpg


우리 블루닷님께서 정작 엉뚱한데서 '푸념'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그저 웃음이 나오기에 여기에 포스팅을 합니다. 여기서 지칭되는 대부분의 '님'은 우리의 블루닷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아주십시오. ^^

일단 해당 포스팅의 저자이신 leopord님도

"나는 자산소득이 부를 결정짓는 요소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덧붙여 노동패널 자료는 근로소득과 사업소득을 통해 도출한 것으로 추측된다."

라고 언급하고 있지요 블루닷님.

결국은 3에서 제기된 논지도 '자산'이 계급을 가르는 주요 요소로 간주될 수 없다는 얘기인데, '자산'이 계급을 가르는 주요하고도 유일한 기준인양 드립을 치던 우리 블루닷님이 이젠 난독증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계급" 개념을 그들이 설명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본인이 생각하는 그 '자산 드립'에 leopord님의 글도 공감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 그저 눈물만 나올 노릇입죠.

애시당초 님이 제기했던 "계급의 정의" 운운은 오히려 상대측에서 우석훈이 "세대"를 하나의 사회적 "계층, 계급"으로 규정짓는 주요한 근거가 뭐냐라는 논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논지만 끓어서 얘기하니 이건 사론곡필의 기상이군요 엉엉.

만일 논리적으로 당시에 반박할 건덕지가 있었는데 부당하게 차단당했다.라고 생각하면, 블루닷님의 개인 블로그에라도 트렉벡이나 반박 포스팅을 올리고 '공론화'시키면 되었을 문제입니다.

그걸 못하고 역으로 당시 자신의 블로그에 댓글 올리는 것을 차단하고는, 이제와서 자신의 논지에 가깝다 생각하는 글(그러나 실제는 아닌 -ㅠ -)을 보고, 자신의 이글루 주소를 숨긴체 "그러게요. 저는 그들에게 이지메 당했어요. 그들은 무례해요" 운운 하는 것은 참으로 점입가경이군요.

님이 반대자들에게 "사회의 현실도 모르는 20대 대학원생 먹물들 운운", "책이나 읽어보셨는지 운운"한 그런 리플들은 죄다 삭제해놓고, loepord님의 포스팅에서도 자신의 블로그 주소(http://BlueDot.egloos.com/ )는 은폐한체, 징징거리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려.

당시 논쟁자들이 님에게 무례하다고 생각하거나, 님이 논리적이었다고 생각하면 님의 댓글과 그에 딸린 리플들을 남겨놓아 그러한 모습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겠죠.

이오공감에까지 올라가 '문제'가 된 글에서, 님이 진정으로 옳고 논리적이라면 그걸 알아줄 이글루스 유저가 하나라도 없을것 같았나요? 그것이야말로 이글루의 수준과 유저들을 우습게 보는 의식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ㅅ' 

그런데 본인이 그 '무례한' 댓글들을 다 지워놓고 자신의 블로그에는 덧글 차단을 한 체, 여기서 '무례'를 운운한다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애시당초 다른 블로그에서 있었던 일을 제 3자의 블로그에 와서 "저도 그들의 막장짓에 당했어욤. 알아주세욤~ 뿌우~"하면서 편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예절입니까? 'ㅅ'

더 이상 운운하면 다른 분들께 누가 될 듯하여 굳이 더 얘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ㅅ' 다만 '누구'처럼 블로그를 숨기고, 댓글을 막으면서, 제3자의 블로그에서 편들어달라고 징징거리는 짓은 일은 안하고 싶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난투를 벌인 점에 주인장이신 leopord님께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관계는 분명히 해야 하겠기에 이렇게 씁니다. 문제가 된다면 자삭하겠습니다.



뱀다리 : 나이는 공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지만,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문이다. 예절이고 뭐고 없이 어린애처럼 "내편 들어줘!" 운운하니.

뱀다리 2 : 자기가 옳다면 굳이 왜 자기 블로그를 숨기시고(socio님 포스팅에서는 블로그 로긴을 했으면서 'ㅛ'), 자기 리플을 '모두' 삭제했는지 모를 일이다.  이것이 바로 대륙의 기상급 미스테리인가 엉엉.  

뱀다리 3 : 정작 자신이 부당하게 덧글차단을 당했다 생각하면 반론의 포스팅을 울려도 부족할 당시에, 우리의 호프께옵선 블로그에 댓글 차단을 하시고 BlueDot.egloos.com/2761627 이런 포스팅을 올리셨다.

이걸보니 왠지...정작 스스로 진주만 기습과 개전을 결의하고, "천하는 왜이리 풍파가 많아 조용하지 못한지."라는 시를 읊었다는 우리 히로히토 천황의 기상이 떠오를 뿐이다. 쵸큼 쫭인듯 -_-)b
 

by 들꽃향기 | 2009/11/25 10:46 | 병림픽참가인증 | 트랙백 | 덧글(5)

송대 경제사 연구의 문제점 - 1

원래는 모 카페에 송대사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 되는 와중에 올린 글입니다. 오히려 저의 성향은 '송대사 애호가' 진성 송빠에 가깝습니다만, 송대 경제사 연구에 있어서 몇몇 '과대평가'되는 문제에 대한 지적을 중심으로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전공이 중국사가 아닌 상황에서 알고 있는 것들을 조야하게 맞춘 것이라 사실 올리는게 두렵기까지 하네요....;; 웹상에는 워낙 고수들이 많으시니 ㄷㄷ

그래도 부족한 글이라고 버리지 말아주시고, 문제되는 점이나 사실관계와 다른 점, 논리나 추산에 문제가 있거나 허술한 점 등이 있다면 기탄없는 지적을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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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송빠인증시리즈 1편.


1. 들어가며 : 송대의 경제규모는 명대 심지어는 현대를 초월하였는가?

 

송(宋)대에 당(唐)대와 다른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강남이 중국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는 명제는 나이토 고난의 당송변혁기론이나, 존 킹 페어뱅크의 중국사론, 해방 후 공산당 치하에서의 중국 학계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논쟁의 부각과 함께 광범위하게 인정받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발전되어 웹상으로도 떡밥(?)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발전 한 것이 바로 "송대의 경제력 규모가 명-청대를 능가한다."라는 명제일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명제는 인터넷 상에 떠도는 괴언(?)이 아니라,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그러한 추정을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나이토 고난의 수제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그의 통설서인 '중국사'에서 송대의 사회경제적 발전은 그 이후의 시대가 따라잡지 못했다.라고 보고 있으며, 마크 엘빈 역시도 '중국역사의 발전형태'에서 송대를 농업혁명, 계층혁명 등의 여러 혁명이 이루어진 시기로 보면서도, 송대 이후의 중국은 퇴락의 조류를 걸었다고 보고 있죠.  한편 세계경제사에 대한 통계로 유명한 엥거스 메디슨의 통계는 송대의 GDP생산을 전 세계 GDP의 절반으로 잡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송대의 농업생산량, 화폐량, 세수의 문제등을 명대와 비교하면서, 명~청대에 비해 송대의 그것이 우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그를 통해서 경제적 분야에서의 '명-청대의 퇴락'이라는 인식으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성질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1편에서는 비교적 두 시대를 비교 연구하는 것에 대한 '세부적인 기준'을 대체로 비교해보고, 2편에서는 송대 경제사 연구방법의 문제점을 지적해보고자 합니다.

 

 

 

 

2. 기준단위의 문제 (1) : 도량형의 변화.

 

대체로 송대 경제혁명의 우선적인 명제로 제시되는 것은 '강남의 개발', 그 가운데서도 우전과 점성도 등으로 대표되는 '농업생산량의 추이'일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각 학자마다 계산의 차이가 있지만, 다음의 표로 대충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1무 당 단위면적 생산량 계산표

           연구자

          당(唐) 

          송(宋) 

     명~청(明, 淸) 

      비고(지역) 

    시바 요시노부

    (斯波義信)

 1석

 2석 

 데이터 없음 

 강남(소항지역) 

   민종티엔 (民宗殿)

 데이터 없음 

 2.5석

 2석

 소주 인근 태호 

    구지전 (顧吉辰),

     치샤(漆俠)

 데이터 없음

 4~6석  

 데이터 없음 

 소주지역  

▶ 상기 표는 리보중, 『중국경제사연구의 새로운 모색』에서 필요한 사항과, 제가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사항등을 임의적으로 뽑아낸 표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 각 시기 별의 문제에 대한 고려에는 중요한 변화가 한 가지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량형 자체'의 변화라는 점입니다. 즉 송대의 도량형은 원대에 변형을 거친 후에 명~청대에 이르게 되는데 도량형의 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 역대 왕조 단위 변화표 (단위 : 1 시두(市斗 : 현대 중국에서 사용하는 斗의 단위), 1 시무(市畝))

 단위

당(唐) 

  송(宋) 

 명(明)

 청(淸) 

 두(斗)

 0.59

 0.66 

 1.025

 1.035 

 무(畝)

 0.85

 0.90 

 0.92 

 0.92 

▶ 상기 표는 김영제, 『당송재정사』초두의 표를 인용한 것입니다.

 

 

위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송 연간의 도량형은 큰 차이가 없지만 명~청 시기의 도량형과 비교했을때, 두 단위는 명~청 시기의 도량형은 약 40% 가량 증가한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이쯤되면 명의 1두는 송의 1.4두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다능...ㄷㄷ)무 단위의 변화는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하더라도, 단위면적 당 생산량은 면적과 생산량으로 평가되는 만큼 '생산량'을 측정하는 기준인 두 단위에 이러한 변화가 있다는 것은,

 

사실상 명~청대의 농업생산량을 송대와 비교하고 싶을 때 40% 가량의 가중치를 더 주어야 한다는 뜻과 동일할 수 있습니다. 모든 비교연구가 이러한 도량형의 차이를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도량형의 문제는 송대의 생산과 명대의 생산에 있어서 도량형 차이라는 것이 '가벼이 넘길 수준'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3. 기준단위의 문제 (2) : 단맥(短陌 :반올림)의 문제

 

송대와 명~청대를 비교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화폐를 통한 수입량의 비교입니다. 특히 한 무제가 오수전을 만든 이래로 중국의 화폐는 큰 변동이 없는 한, '동전'은 무게 및 크기와 구리의 함유율 등에서 1문(文)의 가치...이전왕조에서도 통용되는 화폐단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으므로, 각 화폐마다 시대별로 비록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화폐수입량을 통한 양 시대의 경제력 규모와 추세에 대해서 공평한 평가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는 훼이크고. 이러한 동전을 계산하는 '관행'에 있어서 시대별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당의 경우는 율령을 통해서 화폐의 계산단위에 대한 엄정한 규정을 내렸습니다만, 실제로는 화폐의 액면가치 이외의 '여러 가치'와 시세 및 정황을 고려하여 실제로는 다른 양상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여러분께 '1만원'의 세금을 납부하라는 통지가 와서 세무서로 갔습니다. 그런데 지폐가 없어서 동전으로 세금을 납부하겠다고 하자, 세무서에서는 실제로 7천원만 납부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보일 반응은...

 

사장님 정부가 미쳤어요!

②  이 생퀴들이 이래놓고 다른 데서 세금을 뜯어먹을 것이다.

③ 드디어 좌빨들이 집권한 것인가!

 

로 나눌수 있겠지만 -_-;....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무려' 송대에 말이죠 OYL 

 

 전근대 사회에서의 시장과 거래는 현금가치 이외의 여러 가치와 고려들이 복잡하게 개입되어 있어서, 모든 것이 '상품의 정가(定價)'로 일률화되는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전근대 화폐란 아직은 '불환화폐'로서의 성격보다는, 화폐 자체의 재료에 대한 신용에도 의존하고 있기에 화폐재료의 시세에 따라서 화폐의 액면가치와 달리 실제 가치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양상을 반영하여 단위를 환산할 때(즉 문에서 관으로), 실제 납부액-거래액보다도 적은 화폐, 상품을 받고도 채산성이 있다고 고려되거나, 반대로 규정된 액수이외의 다른 사정을 고려하여, 실제 납부액이 적음에도 이를 '반올림'해주는 관행을 '단맥(短陌)'이라고 합니다. 당대에는 이러한 단맥의 관행을 인정하지 않고 '100맥(陌) = 1관'을 지키도록 규정하지만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송 정부에서는 관청에서 단맥하는 관행을 인정하고 이를 세금을 거두거나 거래에도 쓸수 있도록 허용하되, 그러한 단맥의 하한선을 1관 = 77맥으로 규정하여 어느 정도 허용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명~청 시기에는 이러한 단맥의 비율은 높아져서 1관 = 90~98맥으로 관청에서 규정하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는 명~청 시기가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여 실제 거래액과 명시적 거래액이 일치해가는(즉 상품적 가치 하나로 일원화 되어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명~청 시기의 1관의 수입'은 '송 시기의 1관의 수입'보다는 높이 추산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충 명~청 시기의 화폐수익은 송 시기보다 30% 정도의 가중치를 주면 되는 것으로 마무리...

 

...........로 끝날리가 없죠. 송대의 관행은 이러한 단맥이 관에서 정한 일률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게 큰 문제입니다. 다음의 기록은 '단맥'이라는 것이 왜 출현하게 되었는지와 송대의 단맥의 양상을 잘 보여줍니다.

 

 

"관에서는 대체로 77문을 단맥으로 규정하지만, 생선과 고기의 거래에서는 72문이, 금은의 거래에는 74맥이, 여자종과 누에벌레의 거래에는 68맥이 사용되고 있다." - 맹원로,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도시전맥(都市錢陌) 편.

 

 

이와 같이 상품의 거래행위에 있어 계산되는 단맥의 단위가 다르고, 특히 여종이나 누에벌레와 같이 먹여살리거나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 상품(?)에 대해서는 이러한 부담분(?)을 가산하여 상품 정가보다 더 낮은 금액의 단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반면에 가치가 높고 변질될 염려도 없는 금은은 정식 단맥에 가까운 수치로 거래가 이루어지는)

 

물론 송 정부가 이러한 단맥을 관에서 인정한 단맥 혹은 하나의 상품가치에만 의거하여 가격평가를 한다면 문제가 없겠습니다만....

 

문제는 송 정부가 '안 그랬다는 것'이 문제이겠죠. 시박사에서 외국 상품에 대해 관세를 걷는 것에도 보여지듯이, 일정한 액수에 의거하여 일률적 금액으로 징수한 것이 아니라, 각 상품과 징수품의 단위와 가치를 존중해서 개별상품마다 개별적인 단위와 기준으로 세금을 징수했다는 문제-_-;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명의 경우는 건국 초부터 이러한 징세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중기 이래로는 은정(銀錠)을 중심으로 세액을 통일해나가고 있었지만, 송의 경우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황인우 선생의 '송의 경제력은 풍부했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관리할 만한 재정책이나 회계관리가 없었다'고 지적은 이런 면에서 기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당시 송의 재정수입이라는 것을 명-청 시기에 비교할 때 '단맥의 절대비율'뿐만 아니라 '개별 상품에 대한 제각각의 파악-평가와 그에 대한 환산'이라는 골치아픈 문제를 거친 후에야나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통화량에 대한 통념 : 정책의 변화

 

송대의 경제규모가 명대에 비해서 크다고 인식되는 주요한 사유 중의 하나는, 바로 '동전발행량'을 통한 '통화공급-통화량'의 측면에서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왕안석 신법 시기의 이례적인 경우를 제하더라도 송의 평균 연간 동전 발행량은 200~300만관을 상회하는 데에 비하여, 명 시기에는 연간 화폐 발행량이 30~40만관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양상을 보이니깐요.

 

그런데 이러한 화폐량의 문제는 동일한 송시기를 좀더 세분화하면 달라지는데, 인종의 경력 연간 화폐 발행량은 200만관에 달했고, 왕안석 시기에는 500만관에 달했지만, 남송의 순희 연간에는 갑자기 20만관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 원인은 남송이 화북을 잃고 경제규모가 갑자기 작아진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문제는 사실 국가의 '화폐정책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북송~남송시기를 통틀어 통화량이 부족하다는 문제는 사회 전반에 지적되어 왔지만, 정작 동전의 재료인 구리의 가격은 끓임없이 오르고 있었다는 문제가 존재합니다.

 

북송시기 희녕연간에 화폐제조에 있어서 1천문을 만든다면 제조원가는 이미 900문에 육박하고 있었고, 남송의 소흥 연간에 오면 1천문을 만드는데 2400문의 제조원가가 든다는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때문에 국가는 이러한 동전 발행을 최소화하고, 통화량으로 뿌리는 통화는 지제화폐로서의 '지폐'가 대신해가게 되는데, 이런 지폐 역시 동전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과 각종 현물증권의 지급보장을 약속하는 '국가어음'에 가까웠습니다.

 

이에 대해서 남송 정부는 이러한 지폐의 '정기적인 태환'시에 사용하는 '지불준비금'으로서의 최소한의 동전만을 발행하고, 그리고 현물증권(소금의 지불약속서인 鹽砂, 차의 지불약속서인 茶引 등)의 지불준비금 비중을 늘려나가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이렇게 통화의 유통량으로 다른 형태의 화폐(지폐 등)을 유통시키고, 실제 기축통화인 '동전'의 발행은 줄인다는 정책은 남송 시기 정책의 기조로 유지되었으며, 이는 명대에도 이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명대 만력연간 경우 역시 5문의 동전을 만드는데 7문의 구리가 필요하다는 문제가 존재) 더욱이 명 중기 이후에는 국가가 동전의 발행보다도 은정을 부세의 단위로 삼게 되는 현실에서 동전의 발행은 줄어갈 수밖에 없는 추세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고려하자면, 결국 송대의 동전 발행량이 많다는 것은 명~청대에 비해서 경제규모가 큰 것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같은 송 시기조차도  남송시기에는 명~청대와 같은 양상이 발생하고, 이는 국가의 화폐정책의 전환에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는 점을 살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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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 너무 길어져서 실은 졸음에 약한 근성없는 조루라서 나머지 사항은 다음 편으로 미루고자 합니다. 다음 편에서는 세부적인 문제보다도 송대 경제사 연구의 방법 자체의 실수와 오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자 합니다.

 

 문제가 되는 사항, 사실관계와 다른 사항, 그리고 의문이 있는 점 등은 기탄없이 지적해 주시고, 부족하고 조포한 논지에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y 들꽃향기 | 2009/11/19 04:50 | 역사잡상 | 트랙백 | 덧글(18)

하앍 이거시 루저의 삶

loser

위의 글을 보고 나 역시 한번 위너인지 루저인지 좀 테스트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슴둥.

학벌 : B-

(대졸했다.그러나 취직은 안하고 꼴에 대학원 다니고 있으므로 오히려 감점 'ㅅ'/ )

키 :  C-

(176밖에 안되니 뭐. 요즘은 180이 넘어야 남자 사이에서도 남자로 인정받는 듯 'ㅅ') 

외모 : C-

(그나마 믿는건 피부분이었는데 피로 드립으로 망가지고, 괭이님들이 언제나 할퀴어주시니 말 다했다. 몸매 가산점을 더하면 D가 될듯하여 여기서 스탑.) 

재산 : C-

(한때 잘나간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골에서 사업한다. 뭘 바라리.)

연봉 : F

(가끔 학술프로젝트나 과외 들어오면 받는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나마 들어오는 돈도 친구 혹은 뻘짓에 써버리니 이정도면 '학고'수준...ㄷㄷ)


집안 : C0

(그냥 대한민국의 평범'했던' 직장인 가정)


대망의 종합평가. ----------> D+


으허라어리나ㅓㄹ나ㅣㅇ런아ㅣㅓ...진짜 레알 루저잖아.  (r0ㅇ0ㄱ)

엉엉엉  이러다 나도 언젠간 베트남, 캄보디아 연락처 돌리고 있는거 아냐.

근데 연락처 돌리려고 해도 중개회사에 연회비로 토할돈도 없네...lllOYL 레알 좌절....ㄷㄷ



뱀다리 1 : 전에 1년 연차 후배들(대부분은 180 이상인 남자)과 밥을 먹다가 나온 얘기. "요즘 애들은 왠만해서 '다' 180 넘기지 않아요? 왠지 세대차이 느끼네요?" ..........어 그래 -_- 그래도 살인마보다 나쁘다는 180 이하 운운 안해줘서 고맙다. ㄷㄷ

뱀다리 2 : 위 성적 평가에 대해서 인성 및 성격 등의 기준이 없다고 불평하지 마샘. 그거까지 생기면 더 비참해져. 엉엉 ㅠ.ㅠ


뱀다리 3 : 루저논란의 원인이 된 프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 솔직히 일본이나 미국의 쇼프로 같은걸 보면 이보다 더한 것들도 쌔고 쌔었으니깐.
 
다만 그에 대한 '분노'의 반응들에 대해서는 납득하지 못할 것이, 이미 그런 프로 자체가 담당 PD나 방송국의 제작의도 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들 알텐데, 이런 방송의 노이즈 마케팅 낚시질에 걸리는 것은 왜 때문일까? 가십거리 떡밥도 맨날 먹으면 질릴텐데.  

맘에 안들면 그냥 비웃어주고 즐겨주면 될 뿐이다. 뭐 싸이에 테러를 하나니,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말을 했더니 거기에 달려들어 '미륵관심법'을 토해내며 '창작-해석'들을 하는 것은 아무리봐도 납득이 가지 않을 노릇.


그러고보니 김수영의 시 한구절이 생각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그렇게 분노할 것이 적은 것이 우리사회였던가? 김수영의 말마따나 우리는 '얼마큼 적어져야' 한단 말이던가?


by 들꽃향기 | 2009/11/11 04:07 | 잡소리 | 트랙백 | 덧글(14)

별 웃기는 사람을 다 보겠다.



얼마전에 어느 블로그에서 나름의 지적을 했는데, 그 지적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되시겠다. 

A : 인민과 국민은 같은 의미입니다. 

B : 그렇지 않습니다. 인민은 외국인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범위이지만, 국민은 국가에 소속된 이들만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C : 사실 인민은 권력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국민이라는 용어는 국가에 소속된 이들만을 지칭함으로서 보다 국가종속적인 양상이 있는 것입니다.
초기 제헌의 논란은 이러한 양자의 개념이 다른 차이에서 비롯되어, 헌법에 국민으로 표기할 것이냐 인민으로 표기할 것이냐의 논란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거기서 이승만과 안호상과 같은 우파들이 국민개념을 선호한건 이유가 있지요.

A : 미국은 아직도 인민하고 있는데요? 그럼 후진국인가요? 

B, C : ???? 인민과 국민이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데 뭔 소리여? 

이게 과연 논리적인 대답인가? 누가 '인민'이란 개념을 쓴게 후진국이라고 했던가? -ㅠ -
(오히려 민주주의적인 국가라면 헌법에 '인민'이라고 표기하는게 낫다고 보는 주의인데? 'ㅅ' 말 그대로 권리주체로서의 인간과 외국인을 포괄하는 개념이므로. 그만큼 국민과 인민 개념에는 차이가 있다는거다.)

물론 'A'가 지칭하는 것은 미국 헌법이 그대로 '인민'의 권리 등을 운운하고 있다는 것을 지칭한 것일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미국 헌법 스스로가 그만큼 개인의 권리를 국가의 간섭보다 중하게 여겨서 애시당초 인민과 국민의 개념 차이를 두고 일부러 '인민'이라는 용어를 설정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대한민국 초기 헌법을 제정했던 유진오 역시도 각국의 헌법을 참고해서 헌법을 제정했고, 그에 따라 '인민'이라는 용어를 쓰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했기에 위의 짤방과 같이 말을 남긴 것이지. 

어떤 인간이 매마다 스토킹에 가깝게 따라다니며 밑도 끝도 없이 나에게 진보와 보수의 개념을 아느냐는 식으로 매마다 시비를 걸어주시니 승질난 김에 부기해본다.


원래 성질 같에서는 그 자리에서 그 무례함에 대해서 뭐라고 하려다가,  남의 블로그에서 자기하고 싶은 얘기라고 마구 하는 똑같은 패악질로 해당 블로그의 쥔장들께 폐를 끼치기 싫어 여기다가 끄적여본다.

본인은 꽤나 독특한 인식과 생각을 가지신거 같은데, 그건 둘째치고 인민이랑 국민의 개념에 대해서나 똑바로 깨달으시라지.
그것조차 모르면서 진보와 보수를 운하다니 점입가경. 대답조차도 동문서답이니 대략 그저 안구에 육즙이다.


아니면 본인이 나 같은 우둔한 중생을 위해 그 잘난 진보와 보수의 차이를 한번 속 시원하게 끄집어내어 주시던가. 


따라다니면서 시비를 걸어주시니,  오히려 애증섞인 호감이라도 가지고 계신건지....?

아나 식빵 무서워.
  

  

by 들꽃향기 | 2009/10/22 22:19 | 병림픽참가인증 | 트랙백 | 덧글(15)

지적에 대한 간략한 답변

야채님께서 올리신 지적에 대한 답변이 길어질 것 같아 별도의 글로 대신합니다.
일단 부족한 글에 관심가져주신데에 사의를 표하며, 다음과 같이 저의 생각을 부기하고자 합니다.


# 1.
다소 공감하기 어렵군요. 무엇보다도 청나라는 애당초 조선을 정복할 의도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병자호란에서도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의 속국이 될 것만을 요구했지, 조선 정부 자체를 전복시키고 괴뢰정부를 세우거나 직접적으로 군현을 설치하려는 시도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청나라 측에서 '조선 내부가 안정되지 않았으면 점령할 의도가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점령을 포기했다고 말할 근거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더구나 조선 내부가 그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는 것도 근거가 박약해 보입니다. 청나라에서 조선의 기존 정부를 전복시키고 괴뢰 정부를 새로 만들려는 움직임도 없었고, 무엇보다 전쟁 자체가 너무 짧은 시간에 신속하게 끝나버렸습니다. 만약 청나라가 괴뢰 정부 수립 내지는 완전 정복을 목표로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각오하고 공세에 나섰다고 해도 과연 그 정도로 내부가 안정되어 있었을지야 누가 알겠습니까.

-> 여기서 야채님과 저의 시각차이가 유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야채님께서는 병자호란 당대만 떼어서 생각하시고 저는 병자호란 이후부터 중국이 사방으로 치고들어가는 건륭시기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청의 의도 자체가 어떠했는가?가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청의 입장이 병자호란시기에 '조선은 그냥 복속만 받는 정도'로 생각했다고 해도 그것이 건륭제시기까지 그대로 이어지리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죠.

대표적 예로 베트남을 다시 들겠지만, 건륭시기 이전부터 베트남 역시 청의 우세를 일찍이 우세하고 굴복했습니다만, 결국 레조의 교체와 남북분단(구엔조와 쩡조의)를 맞이하게 되고, 그 와중에 따이선 당의 전국적인 반란마저 일어나자 결국 청의 침입을 불러오게 된 것이죠.

마찬가지로 동몽골-할하 역시 후금시절부터 돌론-노르의 회맹을 통해 '형식상의 복속'만을 받았지만, 강희연간에 동몽골과 할하의 왕공들이 서몽골의 준가르부의 공격을 받게 되어 중심 부족들이 괴멸당하고 분열되게 되자, 이틈을 타 동몽골을 보호의 명목으로 신속시키고, 이들을 관리하는 '이번원(理蕃院)'에 소속시킵니다. 

결국 이러한 사례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청이 병자호란 시절부터 조선을 그냥 신속만 받기로 생각했을지라도, 그 이후의 기간에 조선이 어지럽거나 큰 내적 갈등이 있을 경우에 과연 청이 이를 내버려 두었을까?하는 생각힙니다. 청은 과거의 신속국이라고 해도 내부적인 혼란을 이용해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조선은 기근이나 전란의 피폐함은 있었을지라도, 이들의 사례처럼 다시 내부적으로 혼란을 겪거나 큰 사회적 분열을 경험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 내부의 안정이 결국 청이 병자호란 이래로 세운 방침을 그대로 유지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조선이 이들만큼의 사회적 혼란과 내부분열을 보이는 정황이었거나 사회 시스템이 정비되지 못했다면, 과연 청이 병자호란 시기 당시에 바꾼 방침을 뒤집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었겠습니까?      


# 2.

반대로 명나라도 '병자 호란 기간만큼만' 전쟁을 벌였을때 과연 청나라에 투항하는 장수들이 나왔을지도 의심스럽거니와 (물론 청나라에 공세를 취하다가 패해서 항복한 장수들은 경우가 다릅니다) 과연 명나라 출신 장수나 관료들을 포섭하는 만큼 조선측 장수들의 항복을 받아주었을지 또한 의심스럽습니다. 명나라 출신 장수들은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귀중한 조력자가 되겠지만, 조선은 현재 상태에서도 짧은 기간동안의 전투로 쉽게 항복을 받을 수 있었는데 굳이 조선 고위층을 포섭할 필요가 별로 없지 않습니까. 당대인들이 그러한 상황을 살피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을지는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결국 투항자가 적었다는 것은 내부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명나라를 굳이 완전히 정복할 목표도 희박했고 생존 당시도 의심스러웠던, 누르하치 시절부터 명의 투항자들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르후 전투 이전에 명군을 각개격파하기를 건의했던 이선 역시 군을 이끌고 투항한 한인이고, 동시에 공유덕, 경중명 등은 모문룡과 연줄이 있다가 모문룡이 참수되자 병자호란 이전에 후금에 투항한 이들이죠.

각설하고, 제가 왜 명을 들었냐 하느냐면, 당시 명의 정치상황 자체가 매우 혼란스러워서 '항복하지도 않을 장수들'을 '항복으로 몰아데는 심각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숭정제의 교체와 엄당-동림당의 당파싸움 와중에서, 엄당의 모함을 받은 요동경략 웅정필이 참수되었을 때 그 부하들은 후금으로 도망갔고, 영원도지휘사 원숭환은 참수되었을 때에도 그 부하인 조대수는 결국 자신도 이에 연루될까 두려워 일군을 이끌고 투항하게 되죠. 

더 심각한 것은 금주-송산 전투에서의 명의 장수들의 투항입니다. 원래 명은 산해관-영원-금주를 잇는 라인을 군사적으로 잘 방어하고 우세에 있었습니다만, 조정 내 파벌싸움에서 병부시랑 진신갑은 정파적으로 사이가 안좋은 야전사령관 홍승주를 '군량이 부족하니 속전속결하라.'라고 몰아세워 결국 잘된 방어를 포기하고 적의 아가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패한 홍승주는 명의 기밀정보를 모두 들고 투항하며 이후 청의 입관 이후의 전역에서 활약하게 되죠.

이러한 점을 청 정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에 청은 선전전에 열심이었습니다. 조너선 스펜스도 지적하듯이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이들 중국인들에게 끓임없이 '사대부와 문물의 보호자'이자 '부세와 요역의 경감자'임을 격문과 조서를 통해 스스로 자처했었죠.  

언급한 이런 식의 투항은 단순히 군사적으로 밀려서 어쩔수 없이 투항하는(즉 심하전투 이후의 강홍립과 같이) 경우와 그 원인 유발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명의 장수들의 투항의 사례에서 당시 명의 사회와 정황이 그만큼 혼란해 있었을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며, 이 논리를 역으로 조선에 적용시켜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높이기 위해서 중국의 티벳 지배를 뒷받침하는 듯한 언급을 하시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티벳이 정말 청나라에 점령당했습니까? 청나라에 복속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점은 조선도 크게 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현재 결과적으로 중국의 영토가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중국공산당 정권의 침략 때문이지 청나라 시대부터 중국 영토로 확정되어 있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티벳이 청나라 시대에도 계속 중국 영토였다는 중국측 주장을 수용한다면 아예 원나라 이후로 계속 중국 영토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청나라에서 왜 정복을 했는가 못했는가를 따지면서 우리와 비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 저는 '티벳이 청대부터 중국의 영토였던 것이다.'라면서 중국의 현재 티벳 지배를 합리화하는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만? 김한규선생님이 『천하국가』라는 책에서 티벳을 중국의 기미지배를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사회적 체제와 정황이었다고 언급하였음에도,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사』와 같은 책을 출판하신 이상 중국이 주장하는 '티벳은 예로부터 중국의 영토였음 뿌우~'ㅅ''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저 역시 당시 티벳이 중국의 영토였다는 것이 아니라, 티벳의 정황과 그 정부가 근거하는 사회적 구조가 단결은 커녕, 유목부족사회의 잔재를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고, 오히려 종교적 갈등(황모파와 적모파와 같은)이 존재하여, 이미 몽골이나 준가르부 등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중국의 '기미지배'가 침투할 소지가 높고, 그럼으로서 중국이 티벳으로 자신들의 지배권을 보다 확장할 소지가 높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더욱이 조선과 티벳이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는 말씀에 한번 놀랄 따름입니다. 조선이 언제부터 왕 이외의 다른 괴뢰권력이 설정되어 그가 왕만한 권한을 받고, 내정간섭인이 별도로 설치되거나 청군이 한양 경내에 계속해서 머물렀던 그런 정황인 적이 있습니까?
 
즉, 청이 달라이 라마를 중심으로 한 티벳의 기존 구조를 존중했다고 해도, 결국에는 달라이 라마에 대항하는 괴뢰권력을 수립하고(판첸라마), 내정간섭인을 상주시키며(官吏使), 티벳 주둔군을 두어 이를 감시하는그러한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하에서 티벳이 완전히 자율권을 빼앗겼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를 '조선도 크게 다를게 없다.'라고 말씀하신다면 심히 난감할 따름입니다.
(1950년대의 중국 공산당을 통해서 티벳이 중국의 직접지배에 편입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티벳에 대한 청의 간섭과 조선보다 열악한 복속상황을 무시하는 것 또한 역사왜곡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마지막으로, 덧글에서 언급하신 내용입니다만, 약소국이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해도 피해가 크다는 말씀은 별로 이번 내용과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복속한 게 아닙니다. 단지 그 피해를 입으면서 전쟁을 벌여서 패배하고 복속한 것 뿐입니다. 어차피 전쟁을 벌여서 피해를 입을 거라면 당연히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편이 낫죠.

-> 마지막의 덧글에서 피해가 크다 운운 한것은 조선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양사를 들먹이며 약소국이 강대국을 물리치는 것이 '당연하고도 당연한'일이라고 얘기하는 이들의 말을 쏘아주기 위한 일종의 빈정거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굳이 제가 조선을 '비호'하는 논리로 보아주신다면 오히려 제가 황송할 따름입니다.  

말씀대로 그 피해를 입고 패배하고 복속한거 맞습니다. 그럼 그 패배하고 복속한 상태에서 승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인데, 티벳이나 몽골, 신강과 같이 끝내 조선왕조가 군사적 패배로 인한 명목상의 목속->내정간섭->중국화의 길을 걷지 않은 요인을 찾자는 것이고, 초록불님의 지나가는 말씀의 취지 역시 그러한 것이었지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청은 과거의 명목상 복속국을 제멋대로 속지화하거나 군사적으로 침공한 사례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선은 왜 그러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서 저는 "조선의 사회적 시스템이 유목국가에 비해서 단결력이 좋고, 정치적 정황이 청의 그러한 '입장 바꾸기'를 불러올만큼 호락호락한 상태는 아니었기에 그러하다는 의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저는 그렇게 대답할 이유는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조선의 패배를 합리화하거나 조선이 패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변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군사적으로 패배한 다른 상대들이나 주변국가들은 왜 속지화되어 결국 중국에 편입되었지만, 왜 조선은 그러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청의 의도보다는 그러한 의도를 용납하지 않는 상황을 이끌어 낸것이 당시 조선사회였기 때문이다.'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by 들꽃향기 | 2009/10/19 17:19 | 역사잡상 | 트랙백 | 덧글(76)

왜였을까?

병자호란과 포로

초록불님의 윗글에서 말미에 제기한 의문에 대해 나름의 의견을 내보고 싶었습니다. 다만 글 자체가 병자호란의 포로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만큼, 제가 논하는 사안은 초록불님 글의 원 논지에서 벗어나고, 가볍게 지나가는 말씀을 침소봉대하는 성격의 포스팅이 될까 두렵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선 자체가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군사적인 패전을 겪기는 했지만, 지배층이나 사회세력의 이탈이나 배신-투항이 없었던 점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명의 경우는 이미 군사적인 우세를(금주(錦州)-송산(松山)전투 이전의) 스스로의 사정으로 무너트릴만큼 내부적으로 피폐해 있었고, 오히려 농민반란과 사회 혼란으로 인해 명 사회 내부에서 다수의 협력자를 포섭할 가능성이 높았던 데다가,

몽골, 호쇼트부, 티벳, 운남 등의 경우는 그 사회가 분열되어있거나, 시스템적으로 통합력이 높지 못하여...중심세력에게서 주변세력을 이탈시키거나 회유하여 협력세력으로 만들거나 적어도 분열을 유도하는 그런게 가능했던 정황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청에게 화려하게 저항한 것으로 알려진 준가르부조차도 이전부터 내부 반란으로 인해 중심세력이 오히려 청에 도움을 청할 정도로 시스템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 국가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면 그 사회 내부의 협력자가 반드시 필요했을 터인데,(다수의 피지배층은 시스템의 무게와 문화적 영향를 통하여 압도하면서 동화시키는) 조선의 시스템이란 것이 분열되기 쉬운 유목부족 사회와 거리가 있는데다가, 커다란 내부분열 및 사회적 갈등이 존재했던 상황은 아니었기에 그런 내부 협력자를 얻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더욱이 정묘호란-병자호란의 경험은 그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전쟁을 치루는 내내 적어도 조선은 일군의 장수가 명처럼 군대 전체를 이끌고 투항하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고, 더욱이 청군에 호응하여 고려말 양수척이 그러했듯이 이에 호응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비슷한 사례로 건륭시기 베트남을 들고 싶은데, 그 시기 베트남은 레조(黎朝)가 붕괴하고 사회적인 혼란을 맞이하여, 청군이 이를 노리고 베트남을 침공하지만,
결국 베트남은 따이선 당(西山黨)이 재빠르게 권력을 장악하고 베트남 사회를 안정시키면서, 스스로가 내제(內帝)를 칭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나중에 이 따이선 당의 체제를 구엔조의 지아룽 제가 재빠르게 탈취하긴 하지만요.) 

이에 건륭제는 당시 금천(金川)의 반란 등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피폐해진 탓도 있지만, 결국 베트남 사회가 이들에 의해서 안정을 찾아가고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가자 정복을 포기하고, 입조-조공체제의 복구를 조건으로 전쟁을 종결짓게 됩니다. 즉 자신들의 사회가 분열되고 혼란스러울때 청의 침입을 불렀지만, 결국 자신들의 사회가 안정되자 청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그러한 사례로 보고 싶습니다. 

결국 이러한 저의 논리는 당시 중국(청을 포함한)이 지속적으로 정복할 수 있었던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가 있다고 보고, 그 주요 원인을 사회안정과 시스템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베트남과 조선은 모두 동일한 이유로 살아남았다고 보고 싶습니다. 즉, 당시 조선은 내부적으로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폐해지었을지언정, 극심한 사회분열을 경험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쉽게 무너질 정도로 만만한 정치체계를 갖춘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어찌 본다면 초록불님께서 말씀하신 '청이 먹어봐야 운운'의 논리의 연장선상일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그 먹어봐야 이득도 없는 이유는 '청의 의도'라는 외재적인 요인보다는.....

'그러한 의도를 관철시킬 수 없는 시스템과 사회체제를 만들고 유지한 당대 조선인들의 역량'이라는 내재적인 요인이 더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의 포스팅으로 하기에는 부족한...일종의 정론이나 학술이 아닌, 단순한 의견과 추측일 뿐입니다만, 리플로 적기에는 오히려 민폐가 될 거 같아 트랙백으로 적었습니다.



뱀다리 :  그리고 사실 저는 그러한 이유로....비록 나중에 가서 그러한 내재적 요인을 지탱하는 요인들이 혼란해짐으로써, 한때 우리 사회가 한때 제국주의의 노예가 된 적도 있지만, 그러한 노예상태에 저항하고 맞서 싸우는 원질적인 '사회적 틀'을 만들어준 시기는 이 시기라고 보고.

그런 시기이기에 조선까들이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를 했다지~?'하면서 비웃더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조선빠적 성향이 다소 들어가 있더라도 관대히 양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만 학문적 논리적 비판은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by 들꽃향기 | 2009/10/18 22:30 | 역사잡상 | 트랙백 | 덧글(37)

'모 어용학자'를 위한 변호.

* 주의사항 : 처음에 글을 올릴 당시에는 바보님께서 사카모토와의 논리가 아닌 이태진-운노의 논의를 다루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바보님께서 별도의 리플을 통하여 사카모토와의 논의를 말씀하신 것이었다는 점을 말씀해 주심에 따라, 저가 미리 속단한 것에 대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바보님께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다만 이미 작성된 글을 지우거나 수정하기엔 늦은 시점인지라, 원래의 글은 두고 주의사항을 부기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운노 교수를 둘러싸고 이런 일이 있다 정도로, 그리고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에 있어서 그 자체를 뉴라이트적 견지로 오해하는 것은 상대방의 유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피력하고 싶은 정도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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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3) <한일 청구권 협정과 관련된 문제들>


-> '바보님'의 포스팅에 대한 글은 흥미읽게 있었습니다. 더욱이 저는 원체 법에 밝지 못한 사람이라 법 자체에 대해서 '바보님'과 '번동아제님'의 논의에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허나 굳이 이러한 포스팅을 올리는 것은 한 논의에서 '어용학자'로 규정된 한 분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의 전달과 더불어, 상대방을 '어용학자'로 파악해버리는 일종의 '도식화'에서 어느 분 역시 동일한 '유감'을 느꼈을 가능성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한국의 명망 있는 국사학자가 일본의 모 잡지에 도발(?)하여 시작된 한일병합에 대한 논쟁에서 일본의 모 어용학자를 제외한 대표 학자들이 침묵했던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학자들도 우리 쪽에 불리한 난점을 잘 알고 있다.

-> 이 구절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시고 계시지는 않지만, 일본 잡지 가운데서 한국 병합에 대한 논의는.... 『세카이(世界)』지에서 1999~2000에 다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이신 이태진 선생님과, 일본의 메이지대 명예교수인 운노 후쿠쥬(海野福壽) 교수의 논쟁을 의미하시는 것 같군요.
(사실 이 논의 외에는 다른 논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보님의 말씀에 따르면 운노 후쿠쥬는 '모 어용 학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입장에 서서 이태진 선생님의 논리에 대응한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운노의 주장이나 논의가 일본의 우익세력의 관점을 대표하여 '한국 병합의 전반적인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논의가 이루어져야겠죠.


① 한-일 병합조약의 국제법적 정당성을 옹호하는 동시에, 그 조약에서 이루어진 강제성과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부당함을 부정한다.

② 한-일 병합조약의 국제법적 정당성을 강조함으로서, 2차 대전 후 국가 간 배상의 논의에서 한국은 '불법적 침탈'을 당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일본 역시 개인적 보상을 할수 있을지언정, 국가 대 국가의 '배상'은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이 운노의 논의에 대해서 발견된다면 '바보'님의 의견은 상당한 타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 ①에 대해서 운노는 어떤 인식을 보이는지 살펴볼까요?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합법이라 함은, 일본의 한국 병합이나 식민지 지배가 정당하다는 것을 조금도 의미하지 않는다. (중략) 그들의 합의적인 표현인 국제법-국제관습에 비추어 적합하다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그 적법의 끈을 잡아당겨, 국제적 간섭을 회피하면서 한국을 침략하고, 조선민족을 지배하여 '조선 인민의 노예상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 운노 후쿠쥬, 『韓國倂合』, 岩波書店, 1995, pp. 244~245.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운노 스스로는 '법적상으로는 유효하나 도덕적으로는 부당하다.(有效不當論)'을 견지하고 있고, 2000년도 『교수신문』 역시 운노의 주장을 이와 같이 개념화하고 있죠.


그렇다면 남은 것은 ②의 논의로서, 운노가 '조약의 적법성'을 주장하며, 배상, 즉 '국가적 배상은 부인한다거나 혹은 어쩔수 없자나~식의 논리를 견지하고 있는지를 봅시다.

나는 그렇지 않고 '불법'이든 아니든, 사람이 다른 나라 사람의 의사를 지배하고, 민족이 타 민족을 종속시켰다는 의미에서 '부당한'식민지 지배 - 정당한 식민지 지배는 없다 - 에 대해, 구 식민제국은 깊은 반성에 근거하여 사죄와 배상, 보상을 실행하는 것이 '과거 청산'이라 생각한다.
- 운노 후쿠쥬, 정재형 역, 『한국병합사연구』(논형, 2008), p. 80.
(굵은 글씨는 저의 강조입니다.)


어용학자 치고는 꽤 대단한 발언이지 않습니까?  물론 이것이 운노 교수가 한국 독자들 보기 좋으라고 뿌린 일종의 '립서비스'일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런 것도 있습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우노 후쿠주(海野福壽) 전 메이지대 교수 등 일본인 학자 7명이 25일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펴낸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사실관계 오류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나섰다.
-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일본 극우 교과서에 적극적으로 반대를 전개하는 분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안맞는 주장을 한다고 해서, '어용학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난감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에 대해서 '어용학자'이니 '제국주의적 주장'이니를 전개한 사람은 한둘이 아닌 것 같고 이전, 이후에도 있어왔던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서 운노 교수에 대한 재밌는 기사가 있지요.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301/060020080301.1015172624.html

이 기사를 보면 자신에게 가해지는 대중들의 부당한 비난에 상처입고 몸을 사리는 지식인의 서글픈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인간에게 비판이 가해질 수는 있지만, '나와 다른 입장에 있다는 이유'로 '알아보지도 않고'비판하는 조류는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 납득이 안가는 것은, 쓰시는 내내 한일병합조약의 적법성은 적법한게 아니었다 주장하시는 만큼, 그러한 적법성 여부에 대한 논쟁은 인식하고 계실터이고, 그에 따라 그러한 적법성 여부에 선 논자들의 입장에 대해서 이해하실 분께서...
자신있게 한 학자를 다른 입장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어용학자'라고 주장하시는 것은 납득이 안가기에 더욱 부기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꼬투리 잡기 식의 논의라 생각하신다면, 그저 미리 용서를 구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운노 교수가 병합의 국제법적 적법성을 주장한 것이 병합 자체에 대한 정당성과 배상거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분께서 바보님의 포스팅을 읽고 느꼈을 유감은, 그분께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이나 일제의 악행에 대해서 '국제법상 하자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닐지언데 계속해서 위안부는 물론 뉴라이트 운운까지 이루어지니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바보님께서 언급하시는 것처럼 '인도와 영국의 식민통치 자체'와 '조선과 일본의 식민통치 자체'를 함부로 동질화하는 것은 힘들며, 동시에 그것을 언급하신 분은 '어떤 면에서 유사한 점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구체적인 설명이 미흡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님께서는 해당되는 블로거 분의 '가벼운 언급'을 마치 인도와 조선의 사례를 동일시 한 것인양 말씀하시면서, 그러한 비교 자체가 마치 뉴라이트의 논리를 따르는 것 처럼 얘기하시더군요. 그에 대해서 님의 타당한 논박은 '인도와 조선은 이런면에서 다릅니다.'라는 구체적인 반박이지, '뉴라이트와 다를게 없다.'라는 반박은 적절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각설하고, 제가 이렇게 바보님의 '가벼운 언급'을 '소심하게 파들어가며' 운운하는 것은, 1차적으로는 잘못 알려질 수 있는 상처받은 양심적 학자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이고, 2차적으로는 이러한 님의 '실수'에 다른 한분께서도 이와 같이 간주되진 않았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즉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으로 규정되는 '도식화'에 대한 우려입니다.)
 
이에 대해 님께서 말씀하시는 '병합조약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이태진-운노 간의 논쟁이 아니었거나, 님께서 그 블로거 분께 의도했던 뜻은 그러한게 아니었다면 할말이 없습니다. 제가 오해한 것이었다면 미리 사과를 덧붙여 두고자 합니다.


추신 1 : 감히 서구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비교 자체만 하는게 아니라 나름의 '유사성'을 찾으려고 한, 진정한 뉴라이트 사학자의 이름과 그 저서를 아래에 부기합니다. 그 이름은 드래그 하시면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 강만길, 『일본과 서구의 식민통치 비교』(선인, 2005)




냠...





by 들꽃향기 | 2009/10/16 17:26 | 역사잡상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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