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떡밥투척 역사잡상

본 포스팅은 매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또한 떡밥논란에서 특정 입장(불량산타님의 글, 페다이킨님의 글, 산하님의 글)을 지원하기 위한 의도로 작성되었습니다. 또한 트윗상에서 암약하는 '민족지사님들'께 제시하기 위한 요약본의 성격도 겸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을 보기 힘든 제현들께서는 스크롤을 넘겨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 한편 고전번역원의 데이터베이스 검색결과에 대해서는 나름 트윗 상에서 다루었었는데, 이글루스에서는 이미 페다이킨님께서 다뤄주셨군요. 이에 먼저 페다이킨님의 노고에 감사를 감히 표하고, 저는 여기에 나름의 부족한 저의 해석 및 서지사항-인물약력 등을 덧붙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1. "성만 따서 '민비'라 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에 대해

(1) 인현왕후 민씨

"공은 매번 민비(인현황후 민씨)가 유폐된 서궁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하마하는 예를 갖추었는데, 암매(暗昧)하여 (예를) 혹여 폐할만한 때에도 그러지 않았다." 

(公每過閔妃西宮。必下馬。不以暗昧或廢。)

- 장복추, 『사미헌집(四未軒集)』, 「군수강고이공묘갈명(郡守江臯李公墓碣銘)」중에서.


(2) 소현세자빈 강씨 (신원과 복위가 이루어진 이후) 

"옛날 인조 때 강빈(姜嬪)의 옥사가 있은 뒤로 만약 강석기(姜碩期)의 일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역률로써 논죄하겠다는 분부를 내렸었습니다."

(昔仁廟朝姜嬪獄事後, 若有論姜碩期事者, 當論以逆律爲敎。)

- 『조선왕조실록』, 영조 1년 6월 11일 조 중에서. 


(1)의 항목은 '영남 4유' 중 한명으로 불리던 개항기의 영남 유학자 장복추(1815~1900)의 문집에 기록된, 인현왕후 민씨에게 충성을 다한 무관[이시격]을 기리는 묘갈명의 내용 중 하나이다. 내용과 의도 상 장복추가 인현왕후 민씨를 비하할 이유가 없음에도 '민비'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2)의 항목은 이미 소현세자빈 강씨가 신원-복위된 후(숙종 연간에 신원)의 기록으로, '仁廟'라는 존칭을 쓰고 있음으로서 전반적으로 존칭문제에 신경 쓴 편임에도, 강빈은 그대로 강빈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2. "일본인들이 비하의 의미에서 민비라 낮추어 불렀다."에 대해

(3) 위정척사파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또한 화를 면하기 어려우리라고 스스로 생각하여, 이윽고 당시의 집권자[柄用者]들을 죽이고, 입궐하여 민비를 찾았으나, 그때 민비는 이미 탈출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대원군은 왕비가 승하했다고 함으로써, 군사들을 위안하려 하였다."  

(又自度不免於禍。遂殺當時之柄用者。遂入闕覓閔妃。時閔妃已脫身下鄕。大院君以坤宮昇遐。慰安軍士。)

- 『중암집(重菴集)』, 「행장(行狀)」, 김평묵의 문인 홍재구가 1896년에 쓴 김평묵의 행장에서 발췌.


(4) 안중근 의사

"그러므로 伊藤은 韓國과 日本에 대해서 逆賊이다. 特히 伊藤은 앞서 韓國人을 敎唆하여 閔妃를 殺害케 한 일도 있다." - 「公判始末書 第三回」,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6(안중근편Ⅰ)』 중에서.



(3)의 사례, 즉 김평묵(1819~1888)의 행장을 1896년에 쓴 홍재구(?~1898)는 김평묵, 유인석, 최익현 등과 교류하던 위정척사파 일원 중 한명으로, 김평묵 행장에서 시대배경을 서술하면서 민비란 칭호를 쓰고 있다.

특히 을미사변(1895)이 발생한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민비'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홍재구 본인이 행장의 작성년도 표기를 서기가 아닌 전통적-명분론적인 개념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永曆紀元後二百四十九年]을 볼 때, 그가 비단 민비 칭호에서만 일본인들의 비칭을 받아들였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한편 홍재구의 행장은 명성황후 민씨를, 민비, 곤궁(坤宮)이라는 단어 외에도 '중궁 민씨(中宮 閔氏)'라는 말을 계속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민비'라는 용어가 가지는 비중은 물론 그 연원이 어디서 나왔을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한편 (4)의 사례는 안중근의사의 공초기록에서 안중근 의사의 답변을 발췌한 것이다. 단 이 부분은 원래의 공초기록이 일본어이고, 졸자의 인용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한역한 것인데, 일어본을 확인하지 못해 이대로 기재를 해본다.
만일 일본어 원문도 '민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면 공초기록의 특성상 안의사 본인의 발언으로 볼 수 있으되, 일본어 원본이 다른 표현을 하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 선학들은 번역과정에서 민비란 용어를 비칭이라 딱히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본다. 



3. 결론

물론 당시에 있어서 민비란 호칭은 함부로 쓰일 호칭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것이 비칭의 의미로 특히 일제가 따로이 만들어 낸 호칭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오히려 당대인들 사이에서 대놓고 마구 말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약칭(?)처럼 쓰였던 것이 아닐까 추론하고 싶을 따름이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이대통령' 혹은 '명박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지만 공식문서와 이에 관련된 개인의 공적 입장 표명은 좋든 싫든간에 '이명박 대통령'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본다.)

결국 이런 문제는 자신이 어떤 역사관을 가지고 그에 따라 어떤 호칭(민비이든 명성황후이든)이 나은가로 판단할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데, 이것을 가지고 개념이 있나니 없나니 하면서, '민족정신'의 이름으로 운운하는 것은 시간낭비요, 앞서 든 예에 비추어 보았을 때 적절하진 않으리라고 감히 생각한다.

한줄요약 : 오히려 칭호문제에 있어서 옛 사람들은 우리 생각보다 나이브 했습미다 (....)




* 덧 1.

아직도 칭호문제로 남에게 칭호를 쓰라마라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니. 마치 송대의 '복의'를 보는 느낌이다. 우리는 지금 각자가 자유로운 역사관으로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칭호를 선택할 자유가 있는 공화국의 '시민'이지, 결코 윗분들이 정한 칭호를 준수해야만 하면서 '피휘'해야하는 '왕조의 신민'은 아니지 않은가. 

기왕  유대감을 비판하려면 다른 포인트로 비판해야하지 않겠는가. 역사적으로 비교하기에도 힘든 두 대상을 비교했다는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 덧 2.
민족주의자란 분들. 명성황후 너무 좋아하지 맙시다. 수도를 빼앗긴 상태에서조차도 외국군을 불러들여 이를 막자는 제안과 외부의 요청도 거절한게 조선왕조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습니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병자호란 당시)

그런 조선왕조 최후의 자존심조차도 버리고, 봉급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봉기한 군민들과 그 가족들을 최초로 짓밟은 지도자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한국 최초로 '고문 정치'가 등장한 때가 무엇때문이었는지를 생각하면 견적이 금방 나오지 않습니까?

막짤은 보너스. 이게 바로 '국모의 위엄'입니다.



성질머리 하곤 (...)


어느 저녁, 동생인 머루(女, 1살)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결국 박스 안에서 잠을 청하던 장녀 다래(女, 2살 반)의 모습을 찍으려 하니...


찍지마! 찍지 말라규! 아오 내가 성질이 뻗쳐서!



그래도 자존심은 남아서 암울하게 박스에서 웅크려 자는 모습은 찍히기 싫었는지 앙탈부리는 모습. ㄷㄷ  

저렇게 자존심 강하고 성질부리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마음 씀씀이는 넓은 녀석임 ;ㅅ;
둘째같으면 당장에 막내를 갈궈서 쫓아내고 말았을텐데, 그래도 막내에게 자리 양보해주고 저기에 들어가 있는거라서 (...)




한편 언니의 깊은 마음 씀씀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곤히 자는 막내놈. 넌 언제쯤 저렇게 철을 들까. ㄷㄷ



막짤은 우리 첫째 리즈시절. 딱 막내만한 때에도 그렇게 싸돌아다니면서 물건하나 깬적 없는 명민한 녀석이었다. ㄷㄷ

막내놈은 애교만 많고 감자나 먹을 줄 알지, 명민한거는 언니를 도통 못따라가는 듯 (...) 





(小論) 사상은 법률에 어떻게 반영되는가 - 중국법에서의 '친린법(親隣法)' 중국사관련

이웃분께서 '중국법제사에 있어서 사상이 법률에 미친 영향 문제'를 언급하셨기에 이 문제로 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추가멘트에서 로마법-게르만법 문제를 말씀해주시다보니, 저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름의 小論(?)을 덧붙여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상이 법률. 특히 물권법에 영향을 끼친 사례로서 주목할 만한 것 같습니다.

이에 포스팅을 감히 올려봅니다. 혹여 문제가 있거나 잘못된 점이 있으면 비판과 질정의 말씀 역시 부탁드립니다.  



1. 유교에서의 '개인'의 정의 

로마법에서의 개인의 물권(物權)행사는 그리스-로마사상에서의 개인에 대한 정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특히 근대법에서의 물권법은 데카르트 이래로의 근대사상에서의 개인의 정의. 즉 '절대적 개인'과 그렇게 '절대적인 개인이 보유한 권리'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즉 개인의 정의가 개인의 물권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비슷한 맥락은 전근대 중국 법체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유가사상의 독특한 개인정의가 작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유가사상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권리는 존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인이 사회에 정의되는 것 혹은 존재하는 것은 '절대적인 개인'이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그 개인이 사화적 관계와 우주적 질서와 어떤 연관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게 됩니다. 

때문에 유가의 논리에서 부모-가족과 향촌공동체가 중시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맥락입니다. 부모-가족은 자신이 태어나면서 제일 먼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대상이고, 농촌사회에서 농촌공동체의 협조와 부조는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논리에 따르면 개인의 내면적 선택과 신념의 체계는 존중되어도, 사회적 행동과 권리의 행사는 '자신이 관계를 맺고 있는 집단'에 의해서 제약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바로 물권법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법률적 권리에서 총체적으로 반영된다고 봅니다.



2. 물권법에서의 독특한 개념 - '친린법(親隣法)'의 존재

개인의 선택 자체를 중시하는 유가사상 답게, 부동산 및 동산의 매매권리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보장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정전제(井田制)가 실시되어 개인의 토지매매권이 제약될 것 같은 주대에서도 토지의 소유권 혹은 점유권에 대한 매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한대에서는 동중서가 '송곳 꽃을[入錐] 땅조차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그런 현실이 벌어지는 이유로 호족들의 토지매매를 거론하고 있으니깐요. 

하지만 이렇게 토지 자체에 대한 매매는 자유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권리를 행사하는 개인은 자신이 연계하고 잇는 다른 사회적 맥락과 불가결하다는 유가의 논리 때문에, 독특한 개념이 탄생하게 됩니다. 즉 만일 토지-가옥 등과 같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대상을  매매해야 한다면 자신과 사회적 연계를 가지고 있는 집단(가족 및 친족, 향촌공동체의 이웃)을 우선으로 배려해야한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친족(親)과 이웃(隣)에게 먼저 부동산을 매매하고, 그러고서도 안될 경우에 타인에게 부동산을 매매할 수 있다는 '친린법(親隣法)'의 발생이었습니다. 이러한 친린법의 개념은 일찍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존재하지만,1) 관행을 넘어서 법령으로 구체화되는 것은 당대(唐代)의 일로 보입니다. 


"천하 여러 군에서 도호(逃戶)의 전택(田宅)이 함부로 타인에 의해 없어져서 부세를 책임지는 자가 부족하게 되는데, 먼저 이를 친린(親隣)에게 매매함으로서 그에게 되돌려주어서 의투(依投)하는 바가 없게하라."

天下諸郡逃戶, 有田宅産業, 妄被人破除, 幷緣欠負租庸, 先已親隣賣買, 及其歸復, 無所依投.


- 『당회요(唐會要)』권85, 「도호(逃戶)」


이와 같은 당대의 법률에서의 친린법 개념의 설정과 시행논리는, 다시 송 초의 법률인 『송형통』에서도 반영되게 됩니다.2) 아래는 그러한 친린법의 시행개념을 보다 구체화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물업(物業)을 전당잡거나, 매매하거나, 의탁할 때에는 먼저 가까운 친척[房親]에게 묻고, 친척이 필요 없다고 하면 사방의 가까운 이웃[四隣]에게 묻고, 그도 필요없다고 하면 비로소 타인에게 거래 할 수 있다.

다만 친척이 가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면, 가격을 높게 쳐주는 곳과 거래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소유주[業主], 대리인이나 심부름꾼[牙人] 등이 친척과 이웃을 속여 계약서[契帖]내에 가격을 함부로 올리거나 함부로 숨긴 경우에는 속인 금액수와 정황의 경중을 참작하여 처분한다.

- 『송형통(宋刑通)』권 13, 「호혼(戶婚)」률, '전매지당논경물업문(典賣指當論競物業門)'


이처럼, 중국의 법제사에는 분명 유교사상이 영향을 미치면서, 민사법적 측면에서 개인의 권리라는 측면에 있어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내는 양상이 존재했었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권리에서 보았을 때 이런 친린법만한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예시로 들게 되는군요. ^^;;

물론 친린법의 설정은 비단 유교적 윤리의 반영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향촌공동체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니깐요.
농촌사회에서 수확과 개별 수입이 불안정한 가운데에서 농민들은 이미 공동납적 관행을 통해 부세부담을 공유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산이 매매된다면 친척 혹은 이웃과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우선적인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죠.

또한 비교적 균질한 구성원이 존재하는 농촌공동체 내부에, 이방인-외부자가 부동산 매매를 하고 그로서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여, 향촌공동체 내부의 운영과 내적 단결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을 미연에 막으려는 전근대 농촌공동체의 집단심리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기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농촌공동체의 유지를 통해서 부세납부안정을 노리는 국가의 의도도 개입되었습니다.  



3. 친린법의 미래 : 그대로 시행되었을까?

이처럼 독특한 개념으로서의 친린법은 당대에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송 초에 구체화되었습니다만.....불행히도 송이란 사회는 중국사회가 나름의 내부적 변화를 겪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친린법이 송 초에 당의 법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시행에 있어서는 파행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남송시대의 『명공서판청명집(名公書判淸明集)』단계에 오면 친린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대상이, 親 혹은 隣 한쪽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親과 隣  양쪽에 속해야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법조문만 본다면 친린법이 더욱 엄격해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사실상의 사문화를 뜻했습니다.3)

왜냐면 '친척이면서도 이웃에 거주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사실상 친린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제한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죠. 이는 친족이라 해도 지역 간 거주이동이 활발해지고 경제적 관계가 우선되어 갔던 송대의 양상에서, 국가가 명시적으로 '유교적 이념'을 우선시한다면서도 현실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된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는 이러한 친린법조차도 존재는 하지만, 결국 그 우선순위가 토지와 가옥을 저당잡고 있는 이[典主]에게 우선시되고, 그 다음이 친린권자로 배정되는 양상이 나타나죠.4) 이처럼 경제적 관계가 우선됨에 따라서 친린법은 차츰 그 효력이 상실되어 갔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순의 분기점에서,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도 유학 내부에서 분화되어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즉 종래의 질서를 회복하기를 바라던 이학(理學)자들과, 사회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경세(經世)론자들이 분화되고, 다시 그렇게 분화된 이들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교류하는 상황이 형성되었으니깐요.

송대 이후의 유학과 법률운영은 바로 이런 양상에서 출발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덧 : 화요일 쯤에나 다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웹하드를 보니 일전에 떡밥춘추 3호 기재글을 쓰면서 친린법 개념을 참고하려 봤던 자료들이 있더군요. 이에 집에서나마 급한대로(...) 참고하여 쓰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떡춘을 보신 분들께서는 굳이 새로운 논의라 할 수 없는 글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덧 2 : 역시나 사상관련 책들이 연구실에 있어서 그런지, '유학에서의 개인개념'에 관한 부분이 별다른 레퍼런스가 없이 평소의 제 지론과 개설서에서 간략하게 요약하는 사항 정도로나 쓰인게 마음에 걸립니다. 이에 제현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주석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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