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시대 군사력에 대한 나름의 검토 중국사관련

한단인님깨서 남송의 군사력에 대해 문의를 하심에 따라, 저도 이김에 공부를 해보고 정리를 해보고자, 나름의 견지로 남송 군사력의 통계를 한번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ㄷㄷ

한편 저의 실수와 잘못에 대한 예리한 질책의 말씀이 있어 다소의 사항을 교정하였습니다. 이에 제현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 남송 : 북송과는 다소 다른 출발

송의 병제와 군사제도는 태조 조광윤이 입안한 "줄기를 굳건히 하고 가지는 약하게 한다.(强幹弱枝)"라는 거시적 틀 하에, 중앙군인 금군(禁軍)을 중심으로 하여 지방군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물론 그런 금군이 지방에 파견되어 주둔하는 경우도 있었지만요.) 

그러나 북송의 멸망과 송 황실이 남천하면서 사실상 기존에 있던 군사조직은 와해되었고, 송-금전쟁 초기에는 개별 사령관들이 자발적으로 모집-징발한 군대가 주축이 되어 전쟁을 치뤄야만 했죠. 이들이 모은 병력은 "둔주대군(屯駐大軍)' 혹은 '둔수대병(屯守大兵)'으로 불리며 남송 군사체제의 새로운 근간이 되었습니다. 

비록 송-금 화의 이후 남송 조정은 종래의 중앙군(금군-삼아)을 중심으로 한 군사체제를 정비하지만, 종래의 둔주대군을 완전히 없엘수는 없었고, 30~40만에 달한다는 이들의 병력을 21만여명으로 감축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죠.

그러다가 금의 해릉왕이 재침해오자 약간의 증원을 했고, 그러한 증원이 이루어져서 어느 정도 병력의 기본적인 틀이, 건도 연간(송 효종 시기)에는 1차적으로 정비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건도 연간의 병력 추이에 대해,『송사』「병지」'금군 一조'는 이러한 병력 수치를 제공하는 부분도 있고, 제공하지 않는 부분도 상당합니다.

때문에 ,『송사』「병지」'금군 一조'의 내역보다 남송 군사력의 총계를 구체적으로 내어보려면 다른 자료의 도움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표 1)은 그러한 다른 자료인 『건염이래조야잡기(建炎以來朝野雜記)』를  참고해 작성한 표입니다. (실제로 ,『송사』「병지」'금군 一조'는 『조야잡기』「병마」조의 내역을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나마저도 몇개 내역은 누락되어 있습니다.)


표 1) 건도 연간 남송 군사력의 추이 

이름-명목/주둔지

병력 인원

종류 

주둔지역 

전전사(殿前司)

78,000

삼아(三衙)제군

수도(臨安)

시위마군사(侍衛馬軍司)

30,000

삼아(三衙)제군

수도

시위보군사(侍衛步軍司)

21,000

삼아(三衙)제군

수도

건강부 도통사(建康府 都統使)

50,000

둔수대병(屯守大兵)

연강(沿江)

지주 도통사(池州 都統使)

47,000

둔수대병

연강

진강부 도통사(鎭江府 都統使)

47,000

둔수대병

연강

강주 도통사(江州 都統使)

10,000

둔수대병

경호(京湖)

초주 무봉군(楚州 武鋒軍) 

11,000

둔수대병

회동(淮東)

악주 도통사(鄂州 都統使)

49,000

둔수대병

경호

형남부 도통사(荊南府 都統使)

20,000

둔수대병

경호

흥주 도통사(興州 都統使)

60,000

둔수대병

사천(四川)

흥원부 도통사(興元府 都統使)

17,000

둔수대병

사천

금주 도통사(金州 都統使)

11,000

둔수대병

사천

평강부허포 수군(平江府許浦 水軍) 

7,000

둔수대병(수군)

연해(沿海)

총계 

418,000

 

 

* 본 표는 『조야잡기(朝野雜記)』甲집, 권 18, 「병마」편에서 참조하여 작성. 1) 


이 표를 보면 남송 초기의 군사력은 북송대보다 감소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송대 경력 연간(인종대)의 120만, 희녕 연간(신종대)의 80만보다는 감소한 수치로 보일 수 있죠. 

그렇다면 적어도 남송의 군사력은 북송대보다 감소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답은 다음 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합니다. 



2. 누락된 군사력, 그리고 그 이후의 증강 

그런데 문제는, 저러한 수치가 정리되어 있는 송 효종 시기에도 정부 스스로가 병사들을 40만으로 안보았다는 것-_-;;이 문제입니다.
일단 저 시기의 군주인 송 효종 스스로부터가....

 
"지금 나라의 군사 수가 동에서는 회해(淮海)에서 서로는 천촉(川蜀)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만에 달한다." 2)


라고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죠....더욱이 이후로도 계속해서 군비증가가 꾸준히 이루어져, 병력의 질과 양의 규모가 증가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다수의 남송 지식인들조차도 남송의 군사력 총수를 40만 이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 아래와 같이 드러납니다.    


① "국력이 백만의 병사를 지탱하기엔 충족하지 못하다." - 섭적3)
 
② "진강, 건강, 악주, 저주에 주둔한 병사가 20만에 이르고, 수도에는 14~15만명이 있으며, 각 주마다 있는 상병, 금군, 기타 등등의 수비군을 고려한다면 20만에 이르고, 사천에 다시 또 20만이 있으니, 이래서 지금의 세상이 80만 병사를 먹여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 여조겸4)


이러한 당대인들의 언급과 파악 때문인지, 각 연구에서는 남송의 정규군 병력을 7~80여만, 비정규군 전력을 20여만으로 잡기도 합니다. 6)

물론 '백만'이라는 수가 동아시아 전통적인 문학적 표현에서 '많다'라는 것을 대표하는 형용사이고, 그러한 맥락이 반영되어 있을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비단 ③의 경우는 물론이고, 다시 『송사』와의 대조를 통하면, 적어도 표 1)보다는 많은 수의 병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특히 『송사』「병지」'금군 二조'에서는 위의 표 1)에서 등장한 초주 무봉군 이외의 더 많은 군영이 존재하며, 주둔지도 20여곳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죠. 그 주둔지의 수는 대략 20여개에 달합니다. (그러나 병력 수 제시는 없습니다. OYL) 

한편 수군의 내역에 대해서 놀랍게도 『송사』「병지」'금군 二조'는 남송 시대 육군에 비해, 보다 상세한 수치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아놔 육군수도 기왕 똑바로 다 적어줄 것이지.


표 2) 남송 수군 병력 수의 추이 

수군 내역 / 주둔지

설치 당시 인원

증감 여부

연강(沿江) 수군

불명 (건염연간)

 

명주(明州) 수군

2,000 (건도연간)

 

복주(福州) 수군

150 (소흥연간)

5,000 (건도연간)

진강(鎭江) 주차어전(駐箚御前) 수군

300 (건도연간)

1,800 (순희연간)

연해(沿海) 수군

1,000 (건도연간)

 

조주(潮州) 수군

200 (건도연간)

 

강음(江陰) 수군

300 (건도연간)

 

광동(廣東) 수군

2,000 (건도연간)

 

평강부 허포(平江府 許浦) 수군

7,000 (건도연간)

7,500 (순희연간)

14,000 (남송중기)*

강주(江州) 수군

1,000 (순희연간)

 

지주(池州) 도통사(都統使) 수군

1,000 (순희연간)

3,000 (가정연간)

장주(漳州) 수군 - 천주(泉州) 수군

600 (소흥연간)

 

감포(澉浦) 전전사(殿前司) 수군

1,500 (개희연간)

 

악주(鄂州) 도통사 수군

불명 (개희연간)

 

태평주 채석(太平州 采石) 주차어전 수군

5,000 (가정연간)

 

건강(建康) 도통사 수군

불명

御前에 흡수 (가정연간)

당만(唐灣) 마군행사(馬軍行司) 수군

불명

御前에 흡수 (가정연간)

통주(通州) 수군

불명 (건도연간)

 

지주 청계(池州 淸溪) 공해(控海) 수군

150 (건염연간)

 

양회(兩淮) 수군

2,000 (소흥연간)

 

최대 총계

약 39,550 이상

* 평강부 수군의 14,000명 증원은 『송사』가 아닌, 『中國軍事通史 : 南宋金軍事史』p.126에서 참조. 


이러한 표2)에서 나타난 수군의 내역문제에서 살필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송 효종 이후인 개희 연간, 가정 연간 등에 상당한 군비 증강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정원의 증가로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수군분야에서라도) 때문에 송 효종(건도 연간) 시기의 남송 군사력으로 이후의 군사력을 함부로 단정짓기는 힘들다는 결론도 도출할 수 있겠죠. 

다른 하나는 표2)에서 살필 수 있듯이, 『조야잡기』를 중심으로 한 표 1)이 건도 연간에 작성된 자료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에도, 건도 연간은 물론 그 이전인 건염~소흥 연간(송 고종 시기)에 설치된 수군 내역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야잡기』에서는, 같은 건도연간에도 평강부 허포 수군 7000명만 반영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만하죠.)

결국 『조야잡기』의 기록은 『송사』보다는 전체적인 개략을 상세하게 그렸지만, 다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규군의 세계 외에도, 비정규군 혹은 준정규군의 세계를 역시 주목할 수 있습니다. 



3. 누락된 병력 - 비정규군, 준정규군의 양상 

북송 중기 경력 연간에 전체 병력수가 120만에 달했다는 것은 워낙 잘 알려진 그리고 송을 까기 위해 사실입니다. 그에 비해서 남송의 병력은 크게 감축된 것 같지만, 경력 연간의 병력은 실은 상군, 향병, 궁전수 등의 내역이 상세하게 모두 포함된 반면에, 남송의 것을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겠죠. 

(『송사』텍스트 자체가 국초의 병제, 희녕연간(송 신종) 이후의 북송 군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다뤄도, 남송 군제에 대해서는 잘 다뤄주지 않는 탓이 큽니다.) 

북송때 까지만 해도 상군(廂軍)은 요역군-보급병의 역할이 강했다고 해도 다른 목적으로서의 보조군의 위상을 완전히 상실하진 않았습니다만, 남송대에 들어와 상군은 완전히 요역징발, 보급 등의 보조업무로 떨어져 버리고 치안의 업무에서도 멀어지게 되었죠.
이러한 상군이 이렇게 지위가 떨어지다 보니, 남송 시기의 자료에서는 이러한 상군의 총수를 짐작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사천 지방의 상군 자료인데, 그 자료에서는 송 효종 시기(건덕 연간)에 금군이 2만 7천여이고, 상군이 2만 1천여인 것으로 제시가 되어있습니다.7) 그렇다면 금군과 둔수대병의 수만큼 상병이 있었다고 가정해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상당수의 연구는 상병 자체의 위상이 떨어진 것을 감안하여 총수를 십수만 가량으로 잡고 있습니다.8)) 


준 정규군이라고 볼 수 있는 향병(鄕兵)은 원칙상 정규군은 아니지만, 송대의 군사 운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며 심지어는 금군보다도 낫다는 평을 듣곤 했습니다. 국가는 보갑법이나 사(社)등의 설치를 통해 이들을 관리하고자 하였고, 이러한 틀은 남송에도 상당부분 이어지게 되는데....

(한편 지적을 받고 부연하자면, 이러한 '향병' 중에서 '지방신군'은 남송 중-후기에 둔주대병 못지 않은 주요한 군력의 주체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다른 병종보다도 전투력이 낫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고 하네요.) 

남송 국가가 설치한 향병의 내역은, 건염 연간(송 고종 시기)이후의 양상이 『송사』「병지」 '향병 三조'에 상당 부분 등장하지만, 그 정원이 함께 명기되어 있는 것은 얼마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내역을 그래도 살펴보자면. 

우선 복건의 창장수(槍杖手)는 5,000명, 지주의 용감(勇敢)은 2,000명, 국경지대의 만노수(萬弩手)는 13,000, 회남 지방의 진회(鎭淮)는 26,000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개별 향병 집단마다 병력 수의 차이는 상당하지만, 이러한 내역이 『송사』「병지」항병조에서 등장하는 것은 도합 22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향병의 내역 외에도 궁수(弓手)의 문제가 있는데, 원래 궁수는 하북-하동-녹연-진봉 등의 북송시대 북쪽 변경에서 향병을 징발하여 말그대로 궁수-사수로서 투입했던 것에서 비롯됩니다만, 남송시대에는 현 하나 마다 500명씩을 뽑아 치안이나 도적 토벌 등의 업무를 맡긴 보조군의 성격으로 변모되었죠.   

거기에 계산에 포함되지 않은 새병(塞兵 : 요새 경비병으로 『송사』에는 등장하지만 병력 수 미상), 번병(蕃兵 : 이민족을 포섭한 병력), 장수들이 거느리고 있던 아병(牙兵)까지 계산한다면 실제 병력의 폭은 표 1)에서 나타난 것 보다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결국 표 1)은 국가가 제 1차 송-금 전쟁 당시의 혼란을 정리하고 1차적으로 정리한 정규 병력의 추이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고, 그 이후로는 정규군의 측면에서나 비정규군의 측면에서 오히려 군비와 군액이 늘어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당대 남송 지식인들이 자국의 병력이 '백만'에 가깝다고 한 것은 허언만은 아니리라고 봅니다.


* 일전에 송대사 전공자 선생님께서 이르시길 "송대에 있어서 정확한 수치를 구해보려는 것은 미친 짓이야. 허허."라고 하셨는데, 그 심정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 이것이 바로 선구자의 지혜 (....)

** 사실 『송사』만큼이나 중요한 자료인『송회요집고』「병지」를 현재 거주하는 지방에서 확인-참고하지 못하는 형편이라....이리저리 찔리는게 많네요(...) 『송회요집고』의 참고는 서울에 올라가는 일이 있으면 참고-부연하고자 하며, 이번에도 제현들의 기탄없는 지적과 조언, 질책을 감히 부탁드립니다. (꾸벅)  

*** 자료조사에 여전히 헛점이 많은 부족한 글임에도 이오공감에 올려주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ㅠ.ㅠ


주 1) 일본에서 나온 『전략전술병기사전 - 중국편』에서는 여기에 사천방면 군대를 23만을 더하더군요. 다만 근거가 명확치 않아 부기만 합니다.
주 2) 『송사(宋史)』권 160, 「志」113, 선거(選擧)
주 3) 섭적, 『수심문집(水心文集』권 5, 「병 총론(兵總論)」
주 4) 여조겸, 『역대제도상설(歷代制度詳說)』권 11, 「병제(兵制)」상설(詳說)조
주 6) 韓志저, 軍事科學院 주편, 『中國軍事通史 : 南宋金軍事史』, p.119
주 7) 『송사』「병지」상병(廂兵)조
주 8) 韓志 , 위의 책, p.122.

덧글

  • moduru 2010/06/15 18:38 # 답글

    잘봤습니다.
    그런데, 송사를 좀 공부할려면, "송사"말고 괜찮은 책이 있나요? 추천 부탁드립니다.
  • 들꽃향기 2010/06/15 21:27 #

    잘 보셨다니 다행스럽고도 감사한 일입니다. ^^

    그리고 moduru님께서 질의하시는 것은 저 스스로도 송대사 전공자가 아니기에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만, 연구서-개설서가 아닌 원자료를 중심으로 언급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나름의 답을 하려고 합니다.

    일종의 콘사이즈(?)로 보려면 역시나 요약-비평의 본좌 조익 형의 '차기'에서 송사파트를 보는게 최고인 것 같습니다. ㄷㄷ

    그리고, 『송사』에 준하는 1차사료로 존중받는 것이 남송시기 이도가 쓰다 만(?) 『속자치통감장편(續自治通鑑長編)』이 있고,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 『송대조령집(宋大詔令集)』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는 관심분야에 따라서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전공에 따라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다만 왠만한 송대사 연구자들이 송사 외에 저 책들을 안보는 경우는 거의 못본것 같네요. ㄷㄷ

    그런데 이번 글 쓸때에는 귀찮아서 저는 저 위의 책 3권을 안봤습니다.(...) 때문에 가루가 되도록 까일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흑흑.
  • 한단인 2010/06/15 18:40 # 답글

    으헉!! 이런 엄청난 민폐를 끼쳐드리다니...

    일단 선리플 후필독이라능..
  • 들꽃향기 2010/06/15 21:04 #

    ㅎㅎㅎ 민폐 아닙니다. 사실 일전에 몽-송 전쟁사를 써보려고 자료를 모으던게 있어서요. ㄷㄷ
  • 네비아찌 2010/06/15 18:56 # 답글

    남송군은 생각보다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군요. 하긴 그러니까 몽골과 맞선 양양성의 혈투도 있었을 수 있겠지요.
  • 들꽃향기 2010/06/15 21:05 #

    사실 저 80만의 병력이 모두 양병-정병은 아니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남송은 단순히 북송의 폐단을 그대로 답습한 국가만은 아니었고, 국방에 있어서도 나름 심혈을 기울인 편이라고 봅니다.

    사실 몽골의 본격적인 주 공격을 2번이나 격퇴한 나라가 남송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비단 장강의 천험과 경제력의 덕이라고 평가절하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입니다. ㅎㅎ
  • 한단인 2010/06/15 19:32 # 답글

    아.. 이거 상황을 보면 북송 철강 증가 상황과 남송의 차이는 상군을 감축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차이일텐데 사실 그 차이도 성장세를 좀 더 가속시켰다는 의미 정도지 실상은 대량의 무기 제조를 관영 야장에서 맡아야 했기 때문에 민간 야장이 틈새를 파고들었다는 구조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 셈이네요.

    ...그럼 남송도 철강 성장이 멸망 전까지는 꽤 가파른 증가세라는 얘기가 되는데..

    남송은 철강생산량 통계 연구된게 거의 없잖아요?


    전 아마 안될거에요. OTL


    ...남송 얘기는 빼던가 해야지 원... ;ㅁ;

    일단 본문 내용에서 남송은 빼고 주석으로 요렇게 돌렸습니다.

    [제반 조건을 따진다면 북송과 남송의 철강 생산과 관련한 조건이 비슷한 점이 많아 북송 초에서 중기까지의 발전을 남송도 어느 정도 복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통계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아 확인 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남송의 화남 철강산업 성장이 명청대 불산진 사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의 영향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덧. 그나저나 들꽃향기님 포스팅의 도움으로 자꾸 오이깎기를 하는 셈이 되었는데 이러다가 떡춘 원고를 들꽃향기님이 쓰신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습...(읭?)
  • 들꽃향기 2010/06/15 23:09 #

    명청시대 고증학자들이 '남송 역사는 너무 자료가 없다능! 뿌우!~'를 외친 이래로, 그 양상은 별로 해결이 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ㄷㄷ

    다만 언급하신 부분을 굳이 부연하실 필요는 없으리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ㅎㅎ 저희 선생님 표현을 빌자면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쓰지 않는게 안전'하다는 주의라서요..OYL

    그리고 저의 부족한 글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만, 이런 저의 우행 몇번을 있다고 해서 한단인님의 노력과 원고가 어찌 저가 쓴게 된 셈이라는 것이 가당하겠습니까. ㄷㄷㄷ 나중에 내실 원고를 감히 기대해보고자 합니다. ^^
  • 비공개 2010/06/16 13:46 # 삭제

    철강 생산령의 증감이 상군하고 관계가 있다는게 잘 이해가 안가는데요. 북송에서 철 생산량이 신종 연간에 최고치에 이른 것은 사실이고 그 후로는 감소 추세를 보이다가 남송에서는 최대치의 1/3.5로 줄어들지만 상병의 숫자와는 크게 관계 없습니다. 그런 연구가 있나요? 이해가 잘 안가는데. 보통 금속류 생산량 감소 이유를 관에 납부하는 물량(과리)를 신종 때의 20%에서 계속 올리는 바람에 청부제 욕구가 감소한 점과 남송의 경우엔 주요 광산 지역의 일부가 금에게 점령당한 걸 들텐데.특히 제철 산업이 석탄 산지와 결합하는 경향이 많은데(서주 지역처럼) 이들 대 생산 지역을 상실한게 크게 작용을 했다고 언급되지 상군과 연결시켜 보는 건 조금 무리가 아닌가 싶네요.
    송대 제철업의 생산량 문제는 시기별 생산액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인 연강 총 제철량 문제 자체가 해결이 안되고 있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하는 면이 크죠. 사료 자체가 적기도 하지만 그 사료에서 제시되는 액수가 실제 생산량인가라는 문제가 걸리니. 당장 송대 총 제철량을 최대 생산기에도 2,500톤에서 15만톤까지 편차가 있으니까요. 하트웰이나 칠협이 이야기한 15만톤은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지금도 그런 식으로 계산하는 연구자들이 있어서 남송 철 생산량을 8만톤 정도로 추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생산량을 가지고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철의 연간 소비량을 추정해서 그걸 생산량으로 보는 것이라 믿기 어렵죠. 이러니 연간 생산량 자체가 답이 안 나오는데 시기별 생산량을 추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죠. 북송 이래의 과리 액수는 몇 개 남아있는게 있지만 그게 실제 생산량과 맞는 것도 아니고. 남송은 과리 액수가 남아있는 효종 광종대가 생산량이 피크일텐데 7천톤 정도로 추산할 겁니다(북송대 최고 생산액을 2만톤이 안되는 걸로 추정을 한 경우입니다). 그 이후엔 전란이 계속 벌어지는데다가 주요 생산지인 사천 지역이 몽골과 전쟁 과정에서 초토화되기 때문에 감소하는 것으로 봐야할 겁니다). 과리도 효종 때부터 이종 연간까지 변화가 없는데 그 이후는 기록이 없지만 멸망까지 증가세를 보인다고 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무기 생산은 전란이 일어나거나 하면 여기저기서 수요를 채우기 위해서 민간에서도 만들죠. 북송 멸망할 때 근근히 농기구용 철 단조하는 것으로 먹고 살던 사람이 무기 수요가 폭증하면서 갑자기 부자가 된 일화도 있고 하니.
  • 한단인 2010/06/16 14:52 #

    비공개 님/ 아.. 그게 제가 쓰고 있던 글 상에서 논지를 나가다보니 나온 얘기로 그에 관련한 얘기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일종의 신종 '떡밥'이었거든요(응?)

    무슨 얘기나면요. 이글루스 역밸러 7명이서 떡밥춘추라는 동인지를 만들고 있는데 이번이 3호 째입니다. 근데 저는 2호부터 소재가 바닥이 나서(어?) 전혀 전공도 아닌 부분에서 그냥 예전부터 궁금하기만 했던 분야인 송나라 철강에 대해 한번 끄적거려 본게 이번 원고지요.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쓰면 안되는 일이긴 하지만 동인지명이 '떡밥'춘추라서 어느 정도 면피가 되겠지..라는 자기합리화를 하고 쓰고 있습....

    학부 지식 정도(것두 역사교육과) 밖에 없는데다 구할 수 있는 책이 한정된 상황이라 구할 수 있는 자료라고는 하트웰의 연구통계를 간접적으로 밖에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통계가 틀릴 가능성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고 있긴 했지만 이정도로 편차가 큰 줄은 몰랐습니다. 2천500톤에서 15만톤..(혹 2만5천톤을 잘못 쓰신 건가요?) 일단 기본 전제부터 너무 잘못된 셈이군요.

    원인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생각해보고 있었는데 서주가 석탄산지여서 제철산지가 된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네요. 당시 석탄을 쓰긴 했지만 목탄 사용이 빈도가 더 크다고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저는 서주 인근이 운하 통과지역이라서 운송비 유리지역이라 그런건가 라고 생각을 했는데 전혀 아니었네요. 뭔가 삽질을...;;;

    또한 언급하신 과리에 대해서도 역시 존재를 모르고 있었네요. 일단 제가 구할 수 있었던 통계는 신종 연간 이후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아서 그 부분은 다루질 못하고 신종 연간까지의 급속한 성장에 대한 원인 분석을 제 나름대로 생각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떡밥 제조인거죠.

    그 원인 중의 하나로 상군의 철관 잡역 운용과 관련하여 생각한게 있는데 워낙 졸렬한 논리라서 쓰고도 좀 긴가민가하던 차였습니다. 신종 연간에 상군이 20만 명이 감축되었는데 그 와중에 철관 잡역에 동원되던 상군도 상당수 감축됨으로써 민간 야장에 이 숙련 인원을 저비용으로 고용하게 되는데 영향을 미쳤다.. 뭐 이런 얘기였습니다. 문제는 사료를 직접 본게 아니니 아마도 폭풍같이 까일 거 같다는 예감은 있지만요.


    그리고 무기 제조에 관해서 지적해주신 것은 무기 제조 자체라기보다 관영 야장에서 생필품 제조에 신경을 쓰지 못해서 발생하는 민간 야장의 안정적 수요에 대해서 생각해봤던 것입니다. 물론 지적해 주신 것 자체에 대해서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지적해 주신 점 그야말로 금과옥조 할만합니다. 감사하다능..

    나중에 떡춘 3호가 정식으로 나오면 읽으신 후에 가루가 되도록 까주시면 더할 나위없이 감사하겠습니다.
  • 비공개 2010/06/16 15:45 # 삭제

    아 그런 이야기였군요. 상병 아이디어는 흥미있네요.그런데 조금 무리가 되기는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신종 때 철 생산량이 급증했다고 나오는 수치는 어디에 나오는지 조금 궁금하네요. 문헌통고 등에 나오는 철 생산량이라고 되어있는 건 신종 때 오히려 줄어들고 있을텐데.하지만 신종 때 생산량이 급증한 것은 맞습니다. 신종 때 야철 관리 방식을 바꾸거든요. 사람을 모아서 국영으로 야철하던 것을 20%의 과액을 관에 납입하고 나머지는 판매하는 것을 허용하는 청부제로 바꿉니다.문헌통고 등에 나오는 수치는 신종 이전에는 생산량 전액을 관에 들였기 때문에 생산량이 맞는데 신종 때부터는 1/5만 기록되면서 수치가 줄어든 것이죠. 그걸 감안해서 5배 늘려서 잡는게 지금 생산량이라고 나오는 수치일 겁니다. 과연 단기간에 3배 이상 늘어난 것이 가능하냐는 지적도 있지만 줄어든 것보다는 합리적이고 신종 때에 전황 극복을 위해서 금속 채광 등을 독려하기 때문에 인정이 됩니다. 상병도 야철에 동원되기는 하지만 신종 이전에도 국영이라 해도 일하는 사람들은 주로 모집에 의해 충당되고 있었습니다. 신종 때 그걸 운용도 아예 민간에 맡겨 버린 것이죠.
    서주에 탄광이 있는 건 언급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소식의 시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언급에도 서주의 대규모 민간 야철업자들 언급할 때 석탄 이야기가 나오니까요.운하 변이라 운송이 편리한 점도 작용을 하지만 다른 야철 공장도 주변에 석탄 산지를 끼고 있는 경우가 있고 남송 육유가 북쪽은 석탄을, 남쪽은 목탄을, 사천은 죽탄을 쓴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2천 5백톤은 지금은 거의 언급이 안됩니다. 일본의 일야개삼랑이 2천5백톤에서 5천톤 사이라고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최소치로 언급한 것이라 하트웰 이야기만큼 신빙성이 떨어지죠. 지금은 대략 1만 5천톤 이상은 되지 않을까 하면서 이런저런 수치들이 언급이 됐습니다. 저도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개설이 아니라 전문 논문들의 경우에는 최하는 최저 생산량이 5천톤 이상이다 하는 것부터 3만 5천톤 정도가 합리적이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범위에 들어갔었습니다. 그 이상 수치를 언급하는 경우는 생산량이 아니라 소비량이 이 정도일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것이라 믿기 곤란하죠. 사실은 3~4만톤도 곤란한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 정확한 수치를 낼 수도 없지만 명대 영락 연간에도 생산량이 1만톤이 안됩니다. 명대 최대 생산량으로 추측하는 것이 아마 4만인가 6만톤인가 되는데 송대에 그걸 이미 넘어섰다는게 인정이 안되는 것이죠. 명청대 연구자들이 송대 경제사 연구 까는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수치가 너무 터무니없이 높다는 것인데 철 생산량도 그런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남송대에 8만톤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는데 일억 안팎 인구에 영토도 협소한 남송에서 그 액수가 나온다면 명청대에는 4~5배는 더 생산이 되어야 하는데 명대 최대치가 6만톤이라면(이건 나름 근거가 명확한 편이니) 차라리 송대의 생산량 추정치가 문제가 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죠.
  • 한단인 2010/06/16 17:05 #

    비공개 님/상병 얘기는 저도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느 정도의 인원을 철관 잡역에 동원했고 또 감축 때 어느 정도로 감축되었는지 통계가 없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얘기한게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떡밥이니까' 라며 또 자기합리화를 해봤..(퍽퍽)

    신종 연간 통계는 짐작하시겠지만 제가 원사료 볼 능력이 되지 않아 윌리엄 맥닐이 쓴 <전쟁의 세계사>에 인용된 하트웰의 연구를 인용했을 뿐입니다. 문헌통고까지 볼 깜이 못되어서.. OTL

    미리 말씀드리면 단행본으로서 제가 주로 참고한 것은 위의 전쟁의 세계사와 김영제<당송재정사>, 존 M. 홉슨<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정도고 논문은 안준광「북송(北宋) 상군(廂軍)의 조직과 역할」정도 밖에 안됩니다. 집 근처 시립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는 송대사 관련 책이 없던 탓도 있고 무엇보다 제가 좀 까막눈이라..

    그래서 들꽃향기님과 비공개님이 지적해주신 것에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만 했...OTL

    암튼 하트웰의 통계에는 신종 연간인 1064년 90400톤, 1078년에 125000톤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간접 인용된 것이라 어떤 논증을 거쳐 나온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제 주변에 송대사 전공하신 분이 없어서 여쭤볼 데도 없고 다른 단행본이나 연구를 찾아보기도 요원하여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을 쓴 것인데 언급하신 명대 생산에 비추어 본다면 기록도 그렇고 통계를 낸 것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얘기겠군요. 이거 대체 어쩔... ;ㅁ;

    개인적으로는 하트웰의 통계에서 805년에 13500톤이었다가 1078년에 12만 5천톤까지 성장하는 걸 보고 좀 과장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논증 과정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뭐라 말하기가 힘들어 일단은 신뢰성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논지를 진행시켰습니다. 역시나 하트웰이 제시했던 식량:철 가격 비율(존 M. 홉슨 책의 간접 인용)이 977년에 100:632 였다가 100년 만인 1080년에 사천-100:177, 산서-100:135으로 평균 가격이 4배나 급락하여 1700년대 영국의 100:170을 상회할 정도였다는 것을 보고 가격이 100년 새에 급락한 것이 통계 연구상의 과장이 있긴 하겠지만 가격 덤핑에 의한 덤핑 수요 가능성을 생각했고 성장 원인에 대해서도 각각의 원인들을 그쪽으로 연결시켜 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뭔가 자기합리화 수준을 넘어서 그게 맞을 것이다란 인지부조화 직전까지 간 듯한 기분이네요.(읭?)


    덧. [상병도 야철에 동원되기는 하지만 신종 이전에도 국영이라 해도 일하는 사람들은 주로 모집에 의해 충당되고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하셨던 상병에 대해 무리라고 하신 것은 이걸 염두에 두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맞는지요? 음.. 그러면 아무래도 이 인원이 민간 야장에도 회전되고 있다고 봐야겠네요?


    아.. 그리고 문헌통고의 통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좀 궁금하네요.(뭔가 염치가 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ㅁ;)
  • 한단인 2010/06/16 17:27 #

    비공개 님/ 깜빡 잊고 질문드리지 않았는데요. 신종 대 과리에서 언급된 것이 철광석 채굴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님 생철제조까지 언급하는 건가요?

    아니면 잡용숙철류의 생필품 생산까지 과리 대상이 되는 건가요?
  • 궁상각치우 2010/06/15 20:03 # 답글

    오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저 병력에서 양병이라 부를만한 애들이 과연 얼마나 될런지(한숨)
  • 들꽃향기 2010/06/15 21:14 #

    잘 읽어주셨다니 다행스럽고 감사합니다! ^^

    사실 저 역시 저 정도에서 양병은 절반(...)도 안되리라고 봅니다. 우리식 개념으로 따지면 저 병력에 '휴전선 5분 대기-저지조'가 있고, 다시 송추 방위(?)가 포함되어 있는 식이니 말입니다.(...)

    우리도 조금 떨어진 곳에 기동타격-반격사단이 있는 것 처럼, 저 80만 가량의 병력에서 실제 전투력이 우수한 병력은 10~20여만, 많게는 30여만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추정을 감히(?) 해보는 것은, 일단 북벌 당시에 동원하는 공격군이 비교적 정병이라는 점을 가정하고, 또한 북방세력이 남하해올때 맞서는 기동군의 숫자 역시 정병이라고 보았을때, 그 병력수가 10~20만을 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런데 그것도 북방으로 가면 쥐약(!)이 되는 것이, 북송시기부터 송군의 마필 부족은 심각한 문제였었고, 남송시대에 가면 기병부대가 독자적인 작전을 벌일 수 없을 정도로 기병의 부족이 심각해집니다. 전성기에도 전체 기병이 3~5만명 정도로 추산될까요(...)

    이러니 북벌시에 수군의 쉴드를 조금만 벗어나면 판판히 깨지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ㄷㄷ
  • 산왕 2010/06/15 20:24 # 답글

    남송하면 그저 사조영웅전부터 생각나서 orz..
  • 들꽃향기 2010/06/15 21:20 #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남송에 대한 인식을 만드는 1차 입문서야말로 사조 영웅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양양-번성 공략전을 다룬 이근명 선생님의 논문을, 저희 송대사 선생님이 애들에게 돌렸을때, 애들 반응이 "헐퀴. 양양성이 버틴건 곽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나요?"라고 하더군요...(쿨럭)
  • Mr 스노우 2010/06/15 20:42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생각보다 막강한 병력을 보유했다는 것이 놀랍군요. 게다가 향병이 금군보다 나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라면...
  • 들꽃향기 2010/06/15 21:19 #

    사실 '막대한'이 '막강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남송 지식인들의 징징데는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안구에 육즙)

    그리고 향병이 금군보다 나았다는 말은, 사실 남송시기가 아닌 북송 인종시기....특히 서하와의 전쟁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송의 정론가들 스스로가 ① 향병은 고향을 지키려 하기에 의지가 강하고, ② 그 지형과 적의 언어를 알고 있어 기동과 첩보에 유리하다.라고 평가하고 있었죠.

    적군인 서하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어서 향병이 많으면 전투를 피하고, 금군이 많다고 간주하면 손뼉을 치며 그대로 달겨들었다니 (....) 그저 눈물만 나올 따름입니다.

    남송 시기에는 향병의 성격이 북송과 운용양상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회수지역을 중심으로한 국경지대에는 상당수의 향병이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제가 수치를 언급할 수 있었던 진회, 만노수가 그런 회수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었죠.

    잘 읽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
  • hyjoon 2010/06/15 23:24 # 답글

    몽-송 전쟁사 기대하겠습니다. ^^

    아 그런데 왜 금군보다 낫다는 구절에서 우리들의 인식(의병>관군)이 연상되네요.....(실은 관군도 호락호락하지많은 않았지만)
  • 들꽃향기 2010/06/15 23:26 #

    사실 부끄러운 노릇입니다만, 몽-송 전쟁사는 사실 포기한 상태입니다......OYL

    송사 자체만으로도 버거운데, 『속자치통감장편』이나 당시 문인들의 문집까지 참고해야, 서구 전쟁사에서 나오는 것 만큼의 자료가 나올 것 같에서요 ㅠ.ㅠ

    그래도 우리네는 당시의 정론가들이 의병이 관군보다 낫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한 것에 비해서, 저 시기에는 그랬다는 점이 눈물만 나올 따름입니다. (엉엉)
  • 신시겔 2010/06/16 02:56 #

    그런데 사실 의병도 엄밀하게 따져봤을 때 관군과 그렇게 대조되는 집단이 아니었죠. 의병의 대다수가 초기 전투에서 패해 흩어진 관군인 '산졸'이었다든지, 몇몇 특수한 사례를 빼놓고 의병이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건 김성일이 내려와 수습을 하면서 부터였다든지......
  • 들꽃향기 2010/06/16 12:49 #

    신시겔님// 지적해주신대로 의병이 관군과 완전히 대조되는 집단은 아니었으리라고 봅니다. 조헌의 청주성 공방전이나 기타전역을 보아도 관군과 의병이 연꼐 정도를 하는게 아니라 의병 내에 관군의 산졸들이 포함된 사례는 상당하다고 봅니다.

    사실 그간의 사학이 맑시즘적 민족주의 지향으로 '민중의 자발적인 호국의지'를 강조하다 보니 의병과 관군이 마치 별개인 것처럼 인식되는 지금의 틀이 완성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ㄷㄷ
  • 행인1 2010/06/15 23:34 # 답글

    남송의 군대도 여전히 대군이었군요. '강군'이었는지는 좀 의심스럽지만.
  • 들꽃향기 2010/06/15 23:36 #

    '대군'을 어떻게 '강군'으로 만들 것이냐의 과제는 비단 송대 뿐만 아니라 명-청대에도, 심지어는 현대 중국을 괴롭히는 고질적인 과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ㅎㅎ
  • 맹꽁이서당 2010/06/16 01:37 # 답글

    전 남송하면 칭기스칸 4가 생각나네요.
    칭기스칸이 등장하는 시나리오 1에서 남송에는 주희 육상산 진덕수같은 학자들 뿐. 도저히 다른 나라를 정복할 수가 없죠.
    원나라와 싸우는 시나리오 2에서는 문천상 장세걸 여문환 같은 무력 좋은 장수가 여럿 있긴 하지만, 먼치킨 쿠빌라이 칸과 바얀을 상대로 대도를 점령하기는 무척 힘들더군요. 게다가 몽고의 화포병도 있고...
  • 들꽃향기 2010/06/16 11:06 #

    사실 원조비사 시리즈에서는 농산력 200, 경제력 200의 플게이지를 채운 국가로서 티벳이나 대월 등을 병합해먹는 괴악한 국가였던 남송이, 징기스칸 4에서는 호구 오브 호구로 등장합죠 =_=;;

    그래도 AI에 맡기면 그래도 금과 잘 싸우긴 하더군요. 사람이 하면 눈물나게 짜증나는 팩션이지만 ㄷㄷ
  • 위장효과 2010/06/16 08:14 # 답글

    남송 유일의 명군이라 불리는 효종이라 역시 이쪽에 대한 관리도. (그러고보니 북송 황실은 태종 조광의 계열들이고 남송은 태조 조광윤의 후손들...)
    아무리 남북조-당-북송을 거치며 강남이 경제중심지로 성장했다지만 그래도 저정도의 대군을 먹여살릴려면-땅도 쪼그라든 마당에- 부담이 상당했을 거 같습니다.

    좀 딴 소리지만, 환빠스틱 계열의 무협소설중에 북송 인종 때 서하와의 대립을 배경으로 쓴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호수천 전투라든가 정천 전투에 대한 묘사는 그럭저럭이지만 내용 전반을 꿰뚫는 환뽜스틱함은...(한때 저도 거기 끌렸더라능...) 나중에 주인공(발해 왕실의 후손이지만 송의 명문가 아들로 위장해 들어옴. 패턴은 전형적인 무협지 주인공의 그것)이 국내성 와서는 태왕릉 내에서 천부경을 발견해서 극강의 무공을 얻는다...뭐 그런...제목이 "발해의 혼"이었던가...
    거기서도 송군은 문약...그 자체로 묘사됩니다. 환뽜스틱한 거 외에는 신경을 좀 쓰긴 썼지요. 주인공의 동문수학 친구중에 왕안석(네, 바로 그 왕안석입니다.)도 있고...
  • 들꽃향기 2010/06/16 11:09 #

    사실 송대 강남경제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지적도 있고, 남송말-원대에 가서야 화북경제를 추월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으니, 북송대에 준하는 병력을 먹여살리려면 섭적의 말대로 '국력이 충분치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ㄷㄷㄷ

    그나저나 언급하신 작품은 정말 뽠타스틱하군요. ㄷㄷ 무려 천부경의 압뷁이....ㅎㄷㄷㄷ 근데 발해를 다룬다면서, 하필 송과 서하간의 전쟁인지 배경 설정도 좀 아슷흐랄 하군요.;;
  • 위장효과 2010/06/16 11:37 #

    발해 부흥의 기치를 내건 활동이 오래토록 이어졌다는 데서 "망한 이후에도 이렇게 부흥운동을 일으킨 우리 민족 킹왕짱!"을 기저에 깔고,

    숨어 있던 발해 왕실의 후손 중 형은 학문에 무공까지 연마한 다음에 서하의 황제(아마 초대죠?) 이원호의 군사로 들어가고 아우=주인공는 태어나자마자 송 최고의 무장 가문에 아들로 들어가서(형이 몰래 아이를 바꿔치기 한다는 설정.) 양육된다...여기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왜 북송의 최고 무장가문에 들어가냐면...그렇게 아우가 북송조정내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형은 서하의 힘으로, 아우는 송의 힘으로 요를 정벌하고 거기다 발해를 다시 세운다...이게 형의 계획인데, 이 계획이 틀어지는데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죠. 사이사이 환뽜스틱한 주요 주장들(네, 만리장성 떡밥에 치우 떡밥, 공자 떡밥, 고구려의 태원 공격, 마지막에 천부경은 그야말로 모든 무공의 근원이 되는 최고의 비기-수련하다 고자되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규화보전 급이요, 구음진경정도는 비교도 안될, 동이족 비전의 초절정 무공-가 담긴 비급 수준입니다. 그리고 가림토 떡밥도 당연히 나오고)이 총출동합니다. 아슷흐랄 하지요.
  • 들꽃향기 2010/06/16 12:51 #

    .........-0- 송과 서하와의 악연을 생각하면 형제의 구상은 정말 뽠타스틱하기 그지 없군요. ㄷㄷ 물론 서하도 요의 침입을 두번이나 물리치면서 대립한 적도 있긴 하지만요. ㄷㄷ

    거기에 퇴마록에 버금가는 유사역사학적 소재라니...더 이상 할말을 잃었습니다...OYL
  • 2010/06/16 11:28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들꽃향기 2010/06/16 12:43 #

    오늘도 상세하고도 친절한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 사실 송대를 다루는 만큼 비밀글님의 지적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퍼억)

    1. 지적하신대로, 저 역시 조야잡기에서의 수치는 일단 남송의 군사력이 1차적으로 정리된 시점이지, 남송 군사력의 대강을 파악하기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ㄷㄷ


    2. 지적하신 진덕수 상주문은 사실 재인용이 맞습니다.=_=;;; 사실 섭적과 여조겸의 글은 일전에 스터디를 한 적이 있어서, 그대로 인용했습니다만,

    진덕수 상주문은 원문 확인 없이 『中國軍事通史 : 南宋金軍事史』에서 나온 것을 재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지적하신 것을 보면 '군제를 이렇게 개혁하자'이지, '군제가 이렇게 운용되었다.'는 내용이 아니군요. ㄷㄷ;;

    이는 필히 교정-삭제해야 옳을 일이라고 봅니다. 저 역시 언급하신 Ctrl C + V 신공을 반복한 셈이니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3. 남송군제에 대해 해주신 지적에 대해서 변명(?)을 감히 부기하자면, 사실 삼아(三衙)제군을 금군으로 보고, 지방신군을 향병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본 것은 첫째로는 『송사』 「병지」의 틀을 고수하려던 탓이 크고,

    둘째로는 주요한 틀로 참고한 개설서인 『中國軍事通史 : 南宋金軍事史』의 구분에 의존을 많이 했습니다. 그 책에서는 '정규군'을 '둔주대군'과 '금군'으로 나누어 설명하더군요.

    거기에 제가 종래 북송시기의 중앙군으로서의 삼아의 위상을 금군과 동일시하면서 오인을 일으킨 것이 맞습니다. ㄷㄷ;; 이는 저의 본문에서 남송시대 중앙군에 관한 사항은 금군이 아닌 삼아제군으로 분명히 교정되어야 할 사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방신군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주로 참고한 개설서에서도 별로 언급해주고 있지 않아 향병의 범주에서 독립시킬지에 대해서 확신이 생기지가 못하더군요;;

    이에 지방신군에 대해서도 부기하고자 합니다만, 아직도 지방신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혹여 이에 대한 다른 연구나 개설서가 있다면 역시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수군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하신 속효남의 『남송군사사』를 구해보고 더욱 참고해보고자 합니다.


    4. 그리고 사실 『속자치통감장편』이나 『송대조령집』을 운운한 것은 moduru님의 질의가 일단 송대사 전반을 포함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답을 감히 한 것이었습니다만,

    제가 본문 내에서나 아랫분의 덧글에 대한 대답에서, 남송사 부분에 『속자치통감장편』을 운운한 것은 지적하신대로 잘못이 맞습니다. 그것은 휘종때까지를 다루고 있으니 말이죠;;

    제가 원래 구상하였던 몽-송전쟁사 계획을, 무려 북송대의 문제서부터 소급하려고 하면서 『속자치통감장편』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중요한 사료로 생각하다보니......그것을 아무데서나 마구잡이로 언급한 느낌입니다. 부끄럽네요. ㄷㄷ

    본문 내에서 남송대 문제에 대해서 『속자치통감』을 언급한 것은 교정하겠습니다 ㄷㄷ

    그리고 『송대조령집』을 언급한 것은, 제가 송대사를 입문하는 주요한 저작이었던 신채식 선생님 등의 연구자분들의 글에서 종종 언급되는 것을 보아서 그런 면이 큽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그 사료가 남송시기에 소급될 수 없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또한 『건염이래계년요록』, 『속편양조강목비요』는 사실 참고해본 적도 없고 서지사항만 들어서 크게 생각치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적하신 사항을 들으면 적어도 영종시기까지는 유효한 사료로서 참고해야할 것이었군요. 저의 공부부족에 누차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5. 그리고 언급하신대로 기병의 부족, 병사의 약체화는 부수적인 문제이고, 거시적인-주요한 문제는 국가가 무장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문제가 더욱 크리라는 점에 공감합니다.

    (사실 저의 몽-송 전쟁사 계획도 그런 거시적인 틀을 중심으로 쓰려고 했던 편입니다. ㄷㄷ)

    단평입락의 실패 이후로, 방어체제를 재편하면서 맹공(孟珙)이 제치사들에게 더 큰 권한을 줄 것을 요청한 것이나, 이후에 왕립신, 문천상 등이 나라 전체를 도통(都統)의 통솔 하에 전국적인 '군구'로 나누어 자율적인 작전권을 주자고 주장했던 것은,

    언급하신대로 '무장-사령관들의 자율적인 권한의 제한'이라는 문제를 당대에 의식있는 사람들이라면 볼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송대의 주요한 특징인 '강간약지'의 조법과 문관관료들의 주도권 유지 시도 때문에 실행되지 못했지만 말이죠. ㄷㄷ

    다만 언급하신대로, 일단 남송 군사력의 양적 측면을 먼저 보려던 글이다 보니 이러한 문제는 부연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고, 이에 대한 저의 심도있는 공부가 부족한 탓이 큽니다.

    오늘도 이처럼 세세한 지적뿐만 아니라 저의 무지-잘못을 예리하게 비판해주시니 부끄러우면서도 감사합니다.
    행여라도 아직 이해가 부족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기탄없는 질책을 감히 더 기대하고자 합니다. ^^
  • 비공개 2010/06/16 14:19 # 삭제

    친절하게 답해주시니 고맙죠^^.
    3.지방신군은 아마 처음 제대로 언급이 된 건 황관중의 [남송지방무력]일겁니다. 왕증유 책에도 언급은 했지만 자세하게 다루지는 않았던 것으로. 속효남 책에도 따로 절 하나를 나눠서 각지의 지방신군들을 간단히 정리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사료가 워낙 부족해서 신군의 숫자가 격증하는 이종 이후 시기는 되려 이름만 나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향군보다는 직업 군인인데 재지적 성격은 비슷하지만 여기저기 이동되는 경우가 많다 정도.
    5.문관과 무장 사이의 대립만은 아니고 전방의 문관인 제치사와 중앙 관료 사이의 대립이 더 큰 경우도 있습니다. 지역 방어를 해야하는 제치사는 중앙에서 내려와 보니 갑갑할 지경이라 지역 방어를 하자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제치사가 권력이 강해지니까 중앙 관료들이 경계를 하는 것이죠.사숭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부가하자면 남송에서 보통 제일 정예병은 흥주 등의 사천 주둔군을 꼽는 경우가 많은데 여긴 병력 증감이 상당히 자주 일어납니다. 다른 지역과 달리 남송초부터 오씨 가문이 이들 지역 방어를 계속 담당한 것 때문에 중앙 문관들이 경계를 해서요. 위에 표에 나오는 숫자는 가장 많을 때 숫자이고 전시가 아닐 때는 감축하려고 시도하죠. 재정 문제도 있고. 또 하나는 편제되었다고 보고한 숫자와 실제 병력수가 안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차액을 인마이포겟하는거죠. 오씨 집안이 남송에서 제일 부유한 일족이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저런 실제와 다른 사병 숫자를 이용해서 치부했다고 하죠. 그런데 사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저런 식의 탈루를 이용한 치부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으니까 문관들이 무장들을 까는거죠. 실제 전쟁 양상을 보면 그게 꼭 틀린 것은 아니기도 하구요.
    덧글에 양양-번성전 언급하셨는데 이근명선생님이 어떻게 쓰셨는지 모르지만 일본에선 되려 정말 처절한 공성전이 벌어졌는지 의심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여씨 일족이 중앙의 문관들과 척을 지는 바람에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몽골과 흥정 비슷하게 한 것 아닌가라는. 어디에서 본 건지 기억이 나지를 않아서 더 이상은 자신이 없군요. 치열한 전투가 실제 일어난 지역은 주로 사천이고 다른 지역은 양양 이후로는 사실 거의 제대로 된 저항 없이 점령하죠.
    제가 이걸 언급하는 이유는 남송 군사력이 몽골에 강하게 저항한 걸 보아 상당히 강하였고 더 중요한 것은 이건 인민들의 강고한 저항 때문이다 찬양하자 이게 중국쪽 시각인데 전 그닥 신뢰를 안하거든요. 몽골이 초기엔 서쪽에 중점이 가 있었고 금의 저항이 워낙 처절하다보니 상당히 타격을 받은 상태인데 그런 군대에게도 발렸으니. 나중에 공격을 시작할 때도 몽골 답지 않게 정보 수집을 의외로 등한시한 점이 있습니다. 몽골군의 사천 진격로는 몽골 식의 전법인 것은 맞는데 전통적인 북방에서 남방 공격시의 루트는 아니거든요. 몽케가 죽은 지역이 이전엔 주요 전장이 된 적이 없는 공격 측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곳인데 굳이 기병의 우세를 다 버리고 무모하게 진격한 셈이라. 나중에 정보 수집하고 투항한 한족들 기용하면서 사천 지역이 아니라 양양 지역을 노리는 것으로 전환한 것을 봐도 몽골이 제대로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들꽃향기 2010/06/18 01:33 #

    아아. 이번에도 누차 감사드립니다....! 속효남의 책도 그렇지만 황관중의 책도 참고해봐야겠군요. 잘 모르던 지방신군의 측면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역시나 몽-송 전쟁사 계획을 함부로 쓰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료를 구해야 할게 이처럼 산더미와 같으니.....OYL

    그리고 같은 문관 내에서도 제치사와 중앙의 갈등은, 사실 금 멸망시 몽고에 대한 대외교섭문제에서도 두드러지는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씀을 듣고 좀더 탐구하고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주신 지적에서 또 이렇게 시사점을 얻게 되었네요.

    그리고 언급하신 사천지방 오씨 가문의 문제는 일전에 들은 바가 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ㄷㄷ 정예군으로 꼽히면서도 인원을 속여먹어 돈을 더 타내는 관행은 존재했다니.....그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OYL

    그리고 몽-송 전쟁에서의 남송의 저항문제에 대한 평가는, 사실 말씀하신 중국쪽 동향에 대해 저는 거의 모르다시피 합니다. =_=;;; 남송의 저항에 대한 저의 시각에 최초의 영향을 미친 서적은 사실 육사에서 발간한 『역대병요』 5권에서 다룬, 남송의 저항에 관한 서술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즉, 저는 한때 양양-번성 전투 자체에서의 포위만 생각해 왔고, 양양성이 함락되자 별다른 저항 없이 무너졌다는 식으로 생각해왔는데, 『역대병요』에서 양양성 항복~임안 함락에 이르는 시기에 이뤄진 많은 전투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이 큽니다. 그 외에는 스기야마 마사아키가 맹공에 대해서 짤막하게 언급한 것 정도가 영향을 주었다면 준 것 같네요. ㄷㄷ

    그런 점에서 점에서 저는 사실 금과 서하의 저항과 남송의 저항을 비슷하게 평가하는 것이고, 비단 남송만을 '약체'로 평가절하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인데.........언급하신 중국쪽이 몽-송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즉 한족 민족주의+어설픈 인민주의적 시각은 비공개님의 지적을 통해서 오늘에서야나 처음 알았군요. =_=;;

    다만 언급하신 그런 시각은 저 역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는 입장을 감히 밝히고 합니다.

    덧붙여 이근명 선생님의 논문은 사실 양-번공략전 자체만 다룬다기보다는 오고타이 시절부터의 몽고와 남송의 전쟁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정리해주는 정도이더군요. ㄷㄷ

    각설하고, 오늘도 장문의 답변과 지적,그리고 자료의 제시 말씀에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
  • 2010/06/16 14: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들꽃향기 2010/06/18 01:36 #

    사실 북송시대의 향군 운용은 재정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닌 것 같더라 ㄷㄷ 그점이 남송에서도 이어져가는 것 같고. ㄷㄷ

    사실 인구가 반토막이 났으니, 너말마따나 북송대에 준하는 병력을 유지하려면 남도인의 유입만으로 설명될 수 없고, 마치 제 1차대전 직전의 프랑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징집 대상과 연령의 확대를 가져와 질적 저하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

    그리고 이번 포스팅은 엄밀히 말하자면 몽송전쟁을 위한 꺼리라기보단, 일단 질의에 따라서 남송 군사력의 대강을 추론해 보려는 것이니깐. ㄷㄷ

    너가 말한대로 향병-지방신군 중심 체제가 중신이 되고 몇몇 장군들이 활약하는 몽-송 전쟁 시기는 또 다른 문제인데. 내가 구할 수 있는 자료 내에서는 일단 그 시기의 총계를 내보는건 거의 포기다. OYL
  • 아문 2010/06/17 00:59 # 답글

    송회요집고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용량이 1.8G나 되는군요;;
  • 들꽃향기 2010/06/18 00:56 #

    무려 전산화 된게 있는 것입니까! 맨날 송회요집고는 서울에 올라갈때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서 다시 지방으로 내려오는 저에게 가뭄에 단비와 같은 이야기이군요. ㄷㄷ 나중에 저 역시 인터넷 상에서 찾아봐야겠습니다.

    신경써주셔서 찾아주시고, 제보의 말씀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 델카이저 2010/06/17 15:07 # 답글

    병력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군 기동을 아예 작정하고 막은게 문제죠..-_-;; 질적으로 후달리진 않았던 거 같습니다. 장비빨도 대단했던 거 같고..(뭐 한국군이랑 비슷한 문제가.. 여기가 훨씬 돈은 많았지만..) 윌리엄 맥닐이 송대의 군대가 병크 된 가장 큰 이유가 사령관들의 기동과 전략적 판단을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봉쇄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더군요.. 아예 군 보급로 자체를 이용해서 사령관들의 군 기동로를 제한해 버린..

    수로에서 떨어지면 군대가 순식간에 병크되는데 사실 이런 것도 송 자체에서 의도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조 자체가 군사 반란을 근거로 세워진 판국이고 이러한 문민 장악은 송의 국시이기도 했으니까요..


    몽골이 굳이 사천으로 들어간 것도;;;; 뭐 강건너 가기 졸라 빡세니까;;;;; 양양성만 해도 공격해서 함락하는데 5년이나 걸리고 보면.. 차라리 산길로 스며들어가서 전장내 집결 함 해보자.. 하는 유혹을 받기도 충분하기도 하죠.. 실제로 몇 번 성공(...) 하기도 했으니.. 고려가 그렇게 털렸죠.. 북쪽 성을 공략한다던 애들이 갑자기 남쪽 몇 개 성에 출몰하곤 했으니까..


    그래도 후대 명나라가 비슷한 군사령관 반란 막자고 가정이라는 기괴한 군사 구조를 채택한 거에 비하면 군대의 통제를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국가체제를 잘 유지했다고 전 좋은 점수를 주는 편입니다.ㅎㅎㅎ 악비가 목잘린 건 억울하지만 반대로 악비조차 그렇게 목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에 송과 남송에서 군사령관들의 막장 짓거리는 나오진 않았죠..(적어도 당나라 절도사들 처럼 지 세력 강화하겠답시고 이민족 끌어들이는 개짓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 비공개 2010/06/17 15:59 # 삭제

    견해 차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전 조금 동의하기 힘드네요.
    전반적으로 군기동을 제한한 건 맞지만 북송 중기까지 하드웨어가 어느 정도 될 때 소프트웨어적으로 엉망이 되게 했던 시기의 것이고 북송 후기나 남송만 놓고 보면 하드웨어 자체가 문제가 있는게 사실입니다. 악비나 한세충 군대처럼 사병적 성격이 상당히 강한 군대가 아닌 정규군의 경우엔 작전권을 부여해도 어이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서요. 부차적이라고 해도 개별 전투만 놓고보면 기병 전력이 너무 약해서 야전에서 패하는 경우도 많구요. 금이 오히려 남쪽으로 특히 회수 이남 지역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게 기마 손실이 심하고 보충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게 설득력을 가지니까요.
    장비빨 이야기는 중국인들 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서술하는 서양 책들 경우에 많이 보게되는데(니담 책 영향이 많죠) 전체적 상황을 보면 장비가 숫적 질적으로 그리 압도할 수준으로 강한 건 아닙니다. 화약 이야기를 하지만 수전에서나 가끔 사용되지 육전에서는 전세에 영향을 줄 정도로 운용된 것도 아니고. 니담 책이 비판받는 이유 중에 기술 발전이 사회적맥락 속에서 이루어지고 활용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사회와 유리되어 갑툭했던 기술에 대해 너무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 있죠.
    사천 진격은 기습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세 방향에서 압박하는데 세 군대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죠. 유기적 합동 작전은 기대할 수 없는. 중국 왕조 사이에서 북에서 남으로 쳐내려갈 때 몇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는 경우에도 남쪽 왕조의 수도가 보통 남경이니까 장강 중상류를 점령하고 물을 따라 내려가서 점령하는 식입니다. 사천에서 강을 따라 내려갈 경우 점령 후에 배를 징발해서 삼협을 나와 하류로 가는데 몽케는 사천은 초토화시키면서 정작 뱃길이 아니라 쿠빌라이와 지형을 무시하면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운 코스를 택하거든요. 기병 기동이 극도로 제한되는 산길로 그야말로 일직선으로 주파하면서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쓸어버리려는 것인데 이건 현지 지형에 익숙하지 않고 자기식으로 문제를 보았기에 벌어졌을 가능성이 크죠. 스며들려고 했으면 몽케가 직접 지휘하는 주력이 그렇게 요란스럽게 기세를 올리면서 진격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군요.
    막장 짓 안하는 건 좋은데 송대 장군들이 자기 비하가 심하죠. 문관들은 지휘 능력은 없으면서 갈구기만 잘하고. 전시나 평시나 장군들 갈구는 것으로 자기 과시나 피알하는 사대부들이 많았죠. 처음에는 용기지만(아직 무장들 성질 남아있을 때) 심하게 말하면 뒤에는 만만한 놈 두들겨패서 자기 힘자랑하는 양아치같아 보이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리고 막장 짓거리를 어느 범위로 보느냐는 문제가 있지만 이민족에 투항해서 부역하는 건 송대에도 심심치 않습니다. 북송말에도 그랬고 남송에서는 더 심하구요. 양양 함락 후에 남송이 순식간에 무너진 건 양양 방어 책임자였던 여씨 계열의 무장들이 무더기로 투항했기에 가능했죠. 여씨 일족과 몽골과의 관계도 요즘은 의문 제기하는 것이 많구요. 몽골이 함락을 못 시킨 것이 아니라 안 시킨 것이라는. 그 외에도 잘 안 알려져 있어서 그럴뿐 투항해서 결정적 정보한 군사령관들 많습니다. 상당수가 문관들 갈굼이나 시기에 진저리가 나서 투항하죠. 너무 부정적으로 쓴 것일 수도 있지만 사대부들 상당수가 무장들 잘 되는 것 보느니 차라리 (망하지만 않으면, 나아가서는 뭐 망해도 나와 우리 가족만 괜찮으면) 나라가 잘 안되는게 낫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짓들 많이 합니다. 제 개인적으론 그게 좋은 시스템이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
  • 델카이저 2010/06/17 16:23 #

    1. 장비빨이라고 하는 것은 비단 화약무기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전군에 무기의 보급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송군은 의외로 중장비를 가지고 있었고(중갑옷 등.. 이런건 굉장히 비싸거든요..) 금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신비궁 같은 강력한 노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런 장비들의 보급율도 상당히 높았죠..

    동 시대의 다른 나라 군대를 보면 차이는 극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송군의 100만은 가죽옷 하나 걸치고 나무 판대기 방패들고 조잡한 창 한자루 든 밀리샤 60~70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상당한 갑옷과 창을 보급받고 국가가 이들의 의식을 책임지며 정례적인 훈련을 하는 진짜 군대라는 것입니다. 물론 수준 차이는 좀 있기는 하지만요.. 동시기이 이 정도면 장비빨은 굉장하다(...)고 할 수 있거든요.. 당장 요나 몽골군의 경우는 자기들이 평소에 쓰는 활을 들고 나오는 애들이 훨씬 많으니까요..


    정규군이 작전권을 부여해도 어이 없는 무너지는 이유는 역시 군사 독트린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요새에 의존하는 독트린을 유지하기 때문에 평시의 군대 훈련과 운영도 여기에 맞춰지는 수 밖에 없죠.. 이런 독트린 하에서 사령관들의 작전술 또한 거기에 맞춰지는 수 밖에요.. 몽골군이 상당한 수준의 공성능력을 갖춘 쿠빌라이 시절에 와서도 양양 공격에 5년이나 걸린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이 시기가 되면 서역에서 공성 전문가나 화북에서 상당한 공성 전투의 경험을 쌓은 베테랑 장군들이 있었는데도 이 정도거든요.. 즉 공성 방어전에서 송군의 실력 또한 만만치 않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당나라 절도사들의 막장짓은 부역 수준이 아니라 이민족에게 자기 관할 지역의 영토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해주고 그들을 자기 부하로 받아들인 뒤에 자기 스스로가 독립 군벌이 되는 것이었지요...(쓴웃음...) 차라리 사령관 클래스라도 혼자 도망가는게 낫지 이건 나라를 완전히 갈라먹는 짓이죠;;;; 심지어는 5대 10국의 후한의 경우 요에 아예 참신을 청하고 요군을 끌어들여서 독립한 케이스까지 있습니다.(이쯤되면;;;;;)

    자기 전공이외에 문신이 나대는 것은 좀 문제긴 한데.. 대전략과 작전술에 대한 소양이 어느정도 있는 문신들이 군대를 통제하는 거 자체는 오늘날에도 내려오는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군의 독립된 작전 지휘권을 부여한 결과(당은 굉장히 많은 권한을 줬었죠..) 5대 10국이 개막장 슷호리를 경험하면서 건국된 송에 있어서는 전쟁의 효율성과 안정성 사이에서 저울질을 한다면 아무래도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답답하긴 하지만 할 수 없는 거였죠..
  • 들꽃향기 2010/06/18 01:15 #

    흐음...제가 한동안 못들어온 사이에 두 분 사이에 논의가 이렇게 있었군요, 여기에 대해서 저는 뭐라 부언할 수 있는 깜냥은 감히 되지 못해서 뭐라 말씀드릴 수 있는게 없군요. =_=;; 두분께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_=;;

    다만 논쟁 여부와 다르게, 처음에 덧글을 달아주신 델카이저님의 말씀에 제가 논쟁과 다소 떨어져 대답할 수 있는 사항만 감히 부기하자면....

    근대국가라고 해서 모든 군대가 다 양병은 아니리라 보듯이, 남송 역시 그러하리라고 봅니다. 다만 남송 군대가 가졌던 약점은 사실 군인들 자체가 비겁해서나 약해서가 아니라,

    지적해 주신대로 사령관들의 권한을 상당부분 제한했다는 점이라는 점은 크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반적으로 송이라고 하는 국가의 '시스템'적 문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ㅎㅎ
  • 비공개 2010/06/18 04:20 # 삭제

    관점에 따라 논란이 생기는 주제는 언급안하는 주의인데 제가 그 점은 실수한 것 같군요. 그래도 몇 가지 언급을 한다면.
    무기 보급율이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낫다는 점은 맞죠. 하지만 과연 주변의 강적들에 대해 우위를 담보해줄까 하는 점을 고려해야겠죠. 군대의 장비라는 것은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라.
    남송대의 병서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금의 기병을 어떻게 대적할 것인가와 수성전의 전술인데. 유럽이나 중동 지역에서 창이나 쥐고 나온 보병 나부레기는 맞지만 군대의 주력은 중장기병이이죠. 남송은 물론이고 북송도 기병을 믿을 수가 없으니 보병을 중갑화해야게 필연적이다보니 갑옷과 활 노 등을 강조한 건 사실이고 생산량도 상당한 수준이죠. 하지만 적절하지는 않겠지만 요즘 식으로 비유한다면 전차가 질적 수적으로 부족한 것을 벙커와 대전차 화기를 늘리는 것으로 대항하는게 국부적으로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죠. 요나 금, 몽골과의 야전에 대한 패전 기록은 거의 언제나 패턴화되다시피 하는 것이 전초전 격인 국부적 충돌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다가도 회전이 벌어지면 높은 곳에 포진해있던 기병 돌격에 진세가 무너지면서 끝나죠.
    남송에 한해 수성용 장비빨은 맞는 말씀이지만 송대 전체를 하나로 이야기하신다면 꼭 맞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강의 변을 거치면서 송 영역 내의 성들이 가지는 취약점이 인식이 되어서 성과 해자를 복수 형태로 많이 개조를 하고 거점 성들에 여러가지 장비를 보급하지만 북송이나 남송초의 경우엔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안되죠. 평지성에 성과 해자가 하나인 형태가 많아서 공성전에 익숙한 편이 아닌 여진 군에 많이 함락이 되니까요.
    장비의 질적 문제도 북송의 경우엔 서하는 단조 갑옷이라 시석을 충분히 막는데 우리는 갑옷이 너무 약해서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태조 시기의 갑옷을 모델로 개량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송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거나 하지 못한 걸 알 수 있죠. 물론 남송대에 가면 각 주군에서 일년에 몇 백벌씩 갑옷을 만들도록 하고 있고 개량에도 힘쓰지만 당연히 지역에 따라 편차가 꽤 큰 상황이 계속 되죠.
    허접한 숫자만 채운 군대는 아니라는 말씀은 맞죠. 다만 100만은 아닌 것 같은데^^. 북송 최대기에도 금군은 80만이 조금 넘고 그 중에서도 장비를 제대로 갖추고 훈련이 된 병력은 반이나 조금 넘는 수준인데 그것도 감당이 안되어서 계속 줄이죠. 남송에서도 국가가 무장을 지급하는 정규군은 많을 때도 30만을 조금 넘는 정도입니다.
    송군이 방어전에서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는 것은 맞지만 독트린 자체가 요새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닌 것 같군요. 북송에서 변경 지역의 금군이나 남송에서 둔주대군은 성에 주둔하는 것은 맞지만 훈련 자체는 엄연히 야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죠. 남송에서 공성전에 들어가면 모집된 향병이나 민병을 중심으로 방어 편제를 짜지만 정규군은 공세 시에 주로 쓰는데. 장군들의 독트린이란 것이 제한이 많은 송대에 의미가 있을 지도 의문이구요. 훈련이나 평소 관리야 장군들이 맡지만 전시에 작전권이나 병력 배치는 중앙에서 황제와 문관들이 결정하고 전방에 파겨된 문관 관료들이 총사령관을 맡는 식인데 자신의 구상 같은게 의미가 크게 없죠. 악비 정도나 제한적이지만 권한을 가진 것이지. 서하와 전쟁 시에 보면 송군도 공세적이죠, 처참하게 무너져서 문제지.
    성곽 방어전에 남송군이 상당한 실력을 발휘한 것은 맞지만 양양성 전투가 6년이나 걸린 것이 방어전의 대표적 예가 될 수 있을지는 검토할 여지가 많은 부분입니다. 사천의 조어성 전투는 몽골의 강공에 효과적인 저항을 보여주는 예지만 양양의 경우엔 몽골쪽이 처음부터 강공이 아니라 포위전을 작정하고 나온 것이라 6년이 여문환의 항복을 끌어내기 위한 교섭 기간이라고까지 볼 수도 있으니까요. 몽골이 회회포 동원한 것은 5년차의 일이고 위력은 확실했지만 전면적인 공세는 펴지 않죠. 번성 함락 후에도 전면적인 공세가 아니라 압박을 가하는 정도에서 항복을 끌어낸 것이구요. 양양은 함락 때까지 수로로 계속 보급을 받았던 상황이라 오랜 공성전에서 함락된 성들에서 볼 수 있는 참상은 없었죠.
    요나 몽골이 자기가 쓰던 활을 들고 나왔다고 하셨는데 제가 몰랐던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게 왜 장비가 허약한 근거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냥이 군사 훈련 역할도 겸하는게 북방 민족들 특징이고 당연히 평소 사용하던 것을 전시 동원이 될 때 무기로 사용하는게 낫지 않나요?
    2.당말이나 오대의 절도사들 상당수가 이민족 출신인데 북방 민족 끌어들여서 자신의 부하로 삼아 세력 확대한 것이 막장짓이라고 할 게 있나요. 오늘날의 민족주의 종족주의 중앙집권적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니 그게 막장짓으로 보이는 것이지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유주 지역에 안록산이 죽고 나서 100여년이 지나서도 사당이 있었고 그걸 중앙에서 파견된 절도사가 파괴하는 바람에 지역 군민들의 분노를 사서 절도사는 추방되고 막료들은 피살됩니다. 이민족이 많기는 하지만 유주 지역도 엄연히 한족이 다수를 점하던 지역입니다.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멀리 떨어진 황제나 그 관료들보다는 가까운 북방 민족들이 더 익숙한 지역 정서가 존재하니까 필요하면 북방 민족들과 교섭을 하는 것이죠. 이 문제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족 종족주의자라면 이런 관점이 당연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한족 사대부들의 기록이나 이를 바탕으로 한 한족의 역사관에 반드시 동의해야 할 필요는 없죠. 판타지인 재야 사학은 아예 말할 것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한족들의 역사관에 우리가 꼭 동의할 필요도 없죠. 당말 오대 시기도 동아시아 전체의 구도에서 본다면 절도사들의 행위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죠.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중앙의 황제 권력보다는 이민족이 더 나은 합작 대상이니. 송대의 장령들은 절도사와는 다르죠. 그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이고 임지도 계속 바뀌는데. 송대에 예외적으로 한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던 것이 남송대 사천의 오씨 일족인데 남송 정권에 계속 충성을 바치지만 결국 마지막에 오희가 반란을 일으키죠. 패전 책임을 묻고 있던 상황에서 결국 금의 유혹에 넘어가는데 남송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자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둘 중에 자신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쪽으로 돌아선 것이 되는 것이죠. 다른 장군들은 그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던 것이고. 한족 중에는 대대로 잘 나가는 집안 출신이고 금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도 저런 선택을 하는데, 이민족 출신에 중앙에 대한 충성보다는 대결 심리가 더 강한 지역 정서가 있는 상황에서 독립하는 것도 그들로서는 나쁜 선택이 아니죠. 중앙의 절도사 임명이라는 것 자체가 현지 상황을 사후 추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문관들의 통제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평소의 생각 자체가 이유 없이 무장들을 경멸하니 문제죠. 지상담병하는 애들이 푸른 기와집 계시는 분처럼 내가 책을 봐서 아는데 말야 너희는 전쟁을 모르고 무식해 하는데 전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죠. 후방에 앉자서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전투에서 지고 군대가 후퇴할 때 도망 안친게 대단한 사례처럼 칭송을 받는 상황이니. 뭐든지 과한 건 충분히 나쁘죠.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을 개선할 방법이 있는데도 자기가 재야일 때는 그런 개선안을 이야기하다가도 권력 잡으면 실행안하는게 송대 문관 관료들이고 황제도 차라리 이민족과는 타협이 가능해도 무장들 실력 늘어나는 건 백안시하는 건 문제가 확실히 큰 것이죠.
  • 들꽃향기 2010/06/18 11:52 #

    저가 어느 정도 부연할 수 있는 주제가 나와 비겁하게(?) 논의에 부연하자면,

    1. 사실 저 역시 계주(桂州) 정강부성의 현존하는 도판 등을 보고 구획방어나 다양한 방어시설이 갖춰진 당시 남송 수성의 강력함에 공감합니다만, 그것이 북송 말~남송 초기부터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문제제기 역시 공감합니다.

    송-금 전쟁 당시 순창부에서 유기가 좋은 선례를 보여주고, 그의 저작 『수성록』으로 대표되는 수성 독트린이 널리 퍼지는 것은 효종연간에 효종이 친히 어제 서문을 지어주면서 대량으로 편찬하는 단계를 기다려야 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악주(鄂州)의 경우 우리의 대전급에 해당하는 중요한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의 본격적인 전투용 성곽으로의 개조는 가정 연간에 이루어진 것 같더군요. (출처는 일전에 무창의 도시발달사에 대한 중국측 논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편 담주(장사), 형주(형양) 등의 후방지역 거점 도시의 개축-보수는 몽-송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인 경호제치사 이증백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남송 성곽이 우주방어 벙커(?)로서의 위상을 갖추어나가는 것에는, 그것도 상당한 시일과 함께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보는 주의입니다. ㄷㄷ

    다만 저가 여기서 당대 남송 국가와 당대인들의 노력을 평가하고자 하는 부분이 있다면, 개인의 아이디어를 광범위한 사조와 독트린으로 확장시키며, 그리고 수성-축성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과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ㅎㅎ


    2. 사실 당시 송군 상당수가 단순히 창 하나들고 전장으로 밀어내는, 밀리샤가 아니라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물론 80~100여만에 달한다는 그 병력중에서 다수의 병력이 그러한 장비빨(?)을 받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상당수의 군대를 북방민족의 기마대에 맞서 보병의 개별 방어력이라도 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했겠죠. 그런 점에서 말씀하신 바에 공감합니다. ㅎㅎ

    다만 당대의 부병제가 상당수의 장비를 자비로 부담하는 체제였을 때에 비해서, 부병제 체제가 붕괴한 송대에서는 이러한 장비도를 높이는 문제는 곧장 국가의 국방비 증가와 재정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으로도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ㄷㄷ
  • 에드워디안 2010/06/17 22:56 # 답글

    이렇게 좋은 자료를 올려주시다니, 감사합니다.^^

    1. 남송대에 들어와 상군의 지위가 저하되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미 건국 초부터 금군과 상군 간의 차별대우가 있던 상황이었지요(송대의 국치이념상 당연하겠지만). 군대 내에서도 계급차별이 심각한 수준으로, 특히 장교들이 일반 병사들의 봉급을 횡령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병사들의 생활은 가난을 면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겸직하는 병사가 많았는데, 병영을 나와 다른 곳에 취직을 하려 해도 장교한테 뇌물(매공)을 바쳐야 그것이 가능했다 합니다. 남송대에 들어와선 장교가 병사들을 부려먹는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네요.

    2. 송 효종은 개인적으로 중국 역대 군주들 중 가장 높게 평가하는 인물입니다. 주로 관료제도와 경제 면에서 효과적인 개혁을 시행했더군요(음보의 감원이나 회자발행의 정리 등). 특히 주자의 이학이 성립된 시기도 바로 건도연간이었는데, 효종시대엔 평화와 번영을 배경으로 이학 외에도 다른 여러 학문이 융성했다고 합니다. 남송 초기의 혼란상을 씻어내고 건순지치(乾淳之治)를 이룩한 명군임에도, 어째서 인지도가 낮은지 이해가 안 됩니다.;;

    3. 소위 '몽골빠'들은 남송이 '돈을 주고 평화를 사려는 바람에 망했다'는 식으로 매도하던데, 그런 남송을 상대로 몽골이 거의 반세기간 엄청난 고전을 치뤘다는 사실은 입밖에 내지 않더군요. '유목민족 최고!' '농경민족은 한심하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인간들한테, 그 잘난 '유목민'이 다스린 원대의 중국 사회가 이전 남송대에 비해 퇴보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련지...;;

    4. 덧붙여 말하자면 남송대에는 양자강 하류지역에 한해서만 상업경제화가 진행되었지만, 원대의 침체기를 거쳐 명대에 들어가면 강남전역에 걸쳐 상업경제화가 진행되었다는 주장도 있다네요.
  • 들꽃향기 2010/06/18 01:10 #

    좋은 자료라니요 망극할 따름입니다. 사실 많은 분들의 지적을 받고 참고해야할 자료가 산더미인데 이처럼 쉽게 글을 썼구나 하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OYL

    1. 지적해주신대로 상군이 금군에 비해서 하위단계에 놓였다는 것은 송대 주요한 운영의 틀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남송대에 오면 상군이 아주 아웃 오브 안중이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다보니 그렇게 표현이 된 것 같네요. 송구스럽습니다.

    그나저나 장교에게 또 뇌물을 바쳐야만 또 알바(?)를 뛸 수 있는 구조였다니...정말 부정부패의 끝은 어디까지 달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ㄷㄷ


    2. 확실히 송 효종은 대단한 노력파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다만 인지도가 낮은 것은 후반부의 실패가 크지 않을까 싶은데, 융흥북벌의 실패로 해릉왕의 남침 시기에 뺏어낸 두개 주를 다시 할양해주고 세폐를 늘린 것이라던지, 막판에 그로기(...) 상태로 지냈던 탓도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ㄷㄷ 거기에 방점은 후계자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요..(...)


    3. 사실 저 역시 남송이 단순히 약체이기만 했다는 매도적 시각에는 반대합니다. 다만 저의 몽-송 전쟁사를 그려내고자 하는 의도는 몽골의 중국에서의 초기 부적응을 다루고 더불어 남송인들의 저항을 존중하면서도, 남송이라는 국가가 가졌던 시스템의 문제를 동시에 다뤄보려는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쟁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남송 국가의 한계점과 시스템적 문제는 분명히 인지되어야겠지만, 하나의 대상을 올리기 위해 다른 대상을 '약체'라고 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4. 근자에 들어서 송대 경제사 연구를 비판하는 명청대 경제사 연구자들의 포인트에서도 말씀하신 지적이 종종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ㅎㅎ
  • 에드워디안 2010/06/18 02:22 #

    1.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막론하고 부정부패는 사회의 큰 골칫거리죠.ㅠㅠ;;

    2. 융흥북벌(1163)은 효종의 재위 초기 때의 일입니다. 앞서 고종 소흥 31년(1161) 해릉왕이 이끄는 금군을 채석지전(采石之戰)에서 격파한 기세를 몰아 북벌을 감행했던 것 같은데, 초반엔 약간의 승리를 거뒀다 송군 지휘관들 사이의 대립이 원인이 되어 결국 참패로 끝나고 말았지요.;; 다만, 융흥북벌 후 새로 체결된 금-송간의 화약(융흥화약 혹은 건도화약이라고도 함)에서 오히려 이전에 비해 남송의 입장이 개선되어 금-송 양국황제의 관계가 군신관계에서 숙질관계로, 세폐도 은과 비단을 각각 25만냥, 25만필씩 바치던 것이 20만냥, 20만필로 감액되었습니다.

    효종은 재위 27년째 되던 해에 스스로 퇴위하여 삼남 광종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된 후, 임안성 북쪽의 중화궁으로 거처를 옮겨 수황(壽皇)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종이 자신의 후계문제를 두고 효종과 의견마찰을 빚자 두 부자간 관계는 냉각되었고, 광종이 정신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이러한 골은 더욱 깊어졌다네요. 특히 효종과 사이가 나빴던 광종의 황후가 이간질을 하는 바람에 부자간 왕래마저 중단되기에 이르렀고, 심지어 효종이 죽었을 때도 광종은 끝내 부친의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추밀사 조여우와 태황태후(고종의 황후)의 외조카 한탁주가 모의한 끝에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켜 광종을 유폐하고 새로이 영종을 옹립하게 되었는데, 아무튼 저러한 가정사의 불미스러움이 효종에 대한 평가를 크게 갉아먹은 것 같습니다.

    3. 몽골빠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네들은 '宋'이라는 나라 자체를 비하하는 데 아주 혈안이 된 것 같더군요. 송대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런 소릴 하는 것 같던데, 대표적인 이가 무슨 '닷컴'을 운영하시는 분...;;

    4.^^;;
  • 들꽃향기 2010/06/18 02:26 #

    1. 그러게나 말입니다. ㄷㄷ 사실 전 어렸을때 서구는 부정부패가 없는 줄 알았더랍니다. OYL

    2. 융흥북벌에 대해서는 제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있는 것 같네요 ㅎㅎ 상세한 지적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

    그리고 광종의 안습에는 아내(효종에겐 며느리)의 역할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ㄷㄷ 그런 와중에서 권력계의 본좌인증을 한 진짜 승자는 오태후라는 생각도 듭니다. OYL


    3. 물론 송이라는 나라가 가진 약점과 체제적 한계에는 적절한 비판이 있어야겠지만, '까심'이라는 것은 애시당초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 지양해야하는 것 같습니다. ㄷㄷ
  • 비공개 2010/06/18 04:32 # 삭제

    1.상군의 지위는 더 저하될 것도 없었으니^^ 금군의 지위가 저하되어서 상군과 비슷해 진 것이죠. 봉급만 횡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편제된 수를 안 채우고 그 액수만큼 인마이포켓하는게 쏠쏠하죠. 봉급은 그래도 일부라도 줘야하지만 1-2000천명 안 채우면 그건 전액이 자기 것이라.
    2.효종은 어떻게 보면 조선의 정조와 비슷한 면이 있죠. 고종이 계속 후계자 문제를 경쟁을 시키고 즉위한 것도 고종이 죽은 게 아니라 퇴위하면서 물려주고는 뒤에서 계속 갈구는 구도라 스트레스가 심했죠. 남송에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유일한 황제이지만 평가가 안 좋은 건 초기의 북벌 실패도 그렇고 황제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다보니 사대부 관료들과 트러블이 심했죠. 거기다 실용주의자인데 이학 계열이 공리공론이나 펴는 자들이라고 여겨서 싫어한 것도 겹쳐서 사료에 부정적인 기술들이 많아서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잘했지만 파트너인금 세종도 대단한 인물이라 대외적으로 성과가 없었으니.
  • 들꽃향기 2010/06/18 12:02 #

    그러고보니 금 세종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말인데, 상대방 지도자가 강력한 상황을 만나면 본인도 유능해도 결국 상쇄되는 것 같습니다. (...)

    그래도 그 금세종-송효종이라는 두 군주가 융흥북벌 이후 얌전히(?) 산 것은 매우 적절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

    서로 끝까지 자웅을 가려보겠다고 하는 그 날은 콧수염 총통과 강철의 대원수의 대결처럼 만인을 공포의 도가니로...(...)
  • 에드워디안 2010/06/18 12:08 #

    들꽃향기//1. 서양의 부패도 장난아니더군요. 적어도 1차대전기까지 서유럽 국가의 정계에서도 뇌물이 대단히 성행했다네요. 영국에선 작위거래와 관련된 악질 부패 스캔들이 분출된 적도 있다고 하니...;;

    2. 광종의 아내는 자의황후 이씨라 불린 여자인데 하남지방에 주둔한 절도사의 딸로, 그 아버지가 황실에 일종의 로비를 한 결과 입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격이 억세고 시기심이 강한데다 욕심또한 많아, 이미 태자비 시절부터 좌충우돌적 행태를 드러냈죠. 고종과 효종 사이를 이간질한데다 시아버지인 효종이 꾸짖자 노골적으로 대들기도 했는데, 얼마나 극성맞았던지 고종조차 '저런 왈가닥 같은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나'라며 한탄했을 정도였다 합니다.;; 황후가 된 후엔 더욱 본성을 드러내 효종과 광종 사이를 이간질해 부자간 왕래를 단절시키고, 자기 친정 식구들을 조정에 끌어들여 축재를 일삼기도 했는데 특히 광종이 총애하던 후궁을 매질로 죽이는 등, 잔인한 면모도 있었다네요. 저렇듯 마누라가 사악한 행동들을 일삼자, 거기에 충격을 받은 광종이 정신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오태후는 후궁시절 고종의 생모인 위태후가 금나라에서 돌아오자 적극적으로 그녀의 수발을 들어 환심을 산 덕에 정식 황후로 책봉될 수 있었는데, 그렇게 40여년이 넘게 궁중의 실력자로 살았으니 정계의 본좌가 된 것도 당연할 듯 합니다.

    비공개//1. 금군의 지위가 저하된 것이었군요. 앞으로 더 많이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돈 떼어먹는 덴 정말 별의별 방법이 다 있군요. 대단합니다...;;

    2. 이미 재위 초 융흥북벌 때부터 대신들과의 트러블이 심각했던 것 같은데, 일례로 당시 재상이자 효종의 스승이기도 한 사호(사미원의 아버지이기도 함)부터가 대놓고 북벌에 반대해 천자와 대립했을 정도니... 더욱이 태상황인 고종과 진회의 잔당들이 여전히 건재했던 상황도, 효종에겐 상당한 압력이었죠. 황제권력강화를 말씀하셨는데, 남송대의 제권(帝權)은 이전 북송대 원풍연간의 관제개혁으로 재상의 권한이 강화된 바람에, 북송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나마 효종이 남송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독재군주'다운 인물이었는데, 효종 이후엔 약체 천자들이 잇따랐죠. 광종은 정신이상증세에다 마누라한테 휘둘린 공처가였고, 영종도 몸이 병약해 외척과 대신의 보좌에 의해 간신히 제위를 유지한 형편이었으니... 이종은 그 묘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학을 무척 존숭한 황제로, 재상 사미원이 죽자 이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여 '단평갱화(端平更化)'라 불리는 정치개혁에 착수했지만 용두사미로 끝나버리고, 여기에 실망한 나머지 주색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로 나머지 재위기간을 허비했죠. 도종은 저능아인데다 가사도의 완전한 괴뢰였고... 아무튼 남송황제들을 보면 참 안습입니다.;;

    3. 금 세종은 '소요순'이라 불릴 정도의 명군이라 하던데, 그런데 제가 금사엔 거의 무지한 실정인지라...ㅠㅠ;;
  • 비공개 2010/06/18 14:10 # 삭제

    에드워디안/이황후 아버지가 荊南에 있을 때 황보담이 집에 갔다가 보고 추천했으니 하남이 아니라 호북 아닌가요? 나중에 추증한 경원군절도사는 황후 아버지에게 내려주는 관직이고 경원군은 계림 지역이라 하남은 아닌것 같은데.
    이황후는 스캔들 메이커죠. 전 기억 나는게 광종이 세수할 때 옆에 있던 시녀 손을 보고 무심결에 손 예쁘구나 했더니 다음날 광종 수라상에 시녀의 손이 들어있는 찬합이 올라와 광종이 병이 나서 드러누웠다는 거 보고 허걱했는데. 전 광종이 눈길 좀 다른데로 돌리면 고종하고 효종에게 달려가서 쪼르르 울고 짜고 하는 바람에 고종이 화를 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종과 효종 사이에도 뭔 일을 벌인 모양이군요. 이황후가 효종이나 오황후, 사황후 등에게 완전히 찍힌 건 효종에게 자기 아들 태자로 해달라고 대들다가 효종이 거절하자 열받아서 '전 정식으로 혼인한 사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사이에 정식으로 태어난 애를 왜 책봉안해요'한 게 크죠. 고종 오황후나 효종의 사황후 모두 처음부터 황후로 책봉된게 아니었고 효종은 고종의양자지 정식 자식이 아니니. 일거에 최고 실력자 세 명을 세컨드에 줒어온 자식으로 만들었으니 대책없는 여자기는 하죠. 효종에게 자기 아들 책봉해 달라고 대든 것만 놓고보면 이해가는 면이 있기는 한데 다른 일들이 워낙 엄청난 여자라 그닥 동정 못 받는 것 같습니다. 여성주의 입장에서 독립된 여성 이렇게 조명하려고 하다가도 욕 먹을게 너무 많으니. 광종하고이황후 관계는 심리학적으로도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황제가 질질 끌려다니다 미치기까지 했으니. 수문제 독고황후하고 만났으면 대단했을 듯.
    광종이 정신병이 생긴 건 정사 기록에는 환구단에 제사 지내러 갔는데 비바람이 몰아쳐서 초가 꺼지고 하니 광종이 충격을 받고 쓰러져서 쉬고 있는데 그 사이에 이황후가 광종이 총애하던 귀비를 죽였다는 소식까지 전해져서 맛이 가버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에드워디안 2010/06/18 17:15 # 답글

    비공개//이황후의 아버지 이도(李道)는 일찍이 악비의 악가군에 참가한 전력이 있더군요. 악비의 사후에도 호북에서 장기간 주둔했다는데, 해릉왕의 남침 당시 세운 전공으로 경원군절도사에 임명되어, 나중엔 태위를 지내다 사후에 초왕(楚王)으로 추증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출생지의 경우 이도는 물론이고, 그 딸인 이황후도 하남의 안양(安陽)에서 태어났다네요. 아무튼, 제가 좀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ㅅ-;;

    덧. 독고황후와 이황후가 만났다면, 한 왕조 자체가 끝장나고도 남았을 겁니다.;;;
  • 철의노동자 2010/08/03 03:00 # 답글

    백만대군을 이끌고 있는데 현실은 금나라 오랑캐들에게 발리는 현실.. 왠지 효종의 저 발언 자체가 부정적인 말투로 보이는 건 저 뿐입니까 ㅋㅋ
  • 들꽃향기 2010/08/03 05:49 #

    송사 내에서도 좀 안습적이고 부정적인 맥락에서 한 발언이 맞는것 같습니다. =_=;;;

    사실 효종뿐만 아니라 남송 지식인들이 병력 백만 운운 하는 것은, 저렇게 양병을 하는데도 북벌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국비의 절반을 잡아먹는다는 비명이 다수이다보니 말이죠 =_=;;
  • 인지 2010/11/14 03:53 # 삭제 답글

    한이나 당은 뛰어난 기병을 양성하거나 또는 이민족기병을 적절히 썼는데 왜 송은 돈을 그렇게 많이 쓰면서도 그렇게 못했습니까?
  • 들꽃향기 2010/11/14 05:33 #

    우선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밤 늦게 덧글을 달아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 자신의 앎이 깊지 못해 이 문제에 대해서 '이것이 주요한 원인이다.'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어도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우선적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당말부터 나타나는 국영목장의 쇠퇴현상입니다. 당대의 기마확충은 국영의 목장에서 감목(監牧)의 감독 하에 국영의 관료조직이 운영하는 목장에서 말의 사육과 공급을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그것이 당의 전성기와 기율이 바로섰던 시기에는 엄정하게 지켜졌지만, 현종시기에 이르면 규율의 이완, 그리고 관료조직의 운영 경직화 등으로 인해서 마필을 공급하는 일에 차질을 빚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현종시기 당대에는 민간운영 등의 변칙을 적절히 사용한 왕모중과 같은 재능있는 관리들의 적극책으로 이를 어찌 어찌 넘길 수 있었지만, 현종시기 이후에는 결국 중국은 외지에서 말을 수입해오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됩니다.

    특히 안사의 난 이후로 회홀(위구르)이 당에게 골치아프지만 어찌되었든 전략적 파트너(?)로 떠오르면서 비단과 말을 교환하는 무역체계가 성립되었고 이때부터 중국은 외지에서 상당수의 마필을 공급받는 위치에 전환되게 됩니다.


    2. 한편 마필의 문제 뿐만 아니라, 전투병으로서의 기사(騎士)의 양질적 확보도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언급하신 한-당의 이민족 전쟁과정에서 중국 조정은 농서 및 하동, 유주 지역 등에서 대량의 기사를 징발-모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죠.

    그러한 기사의 양성은 오랜시간을, 그리고 말을 기를만한 여력의 재력이 동시에 존재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아시리라고 봅니다.
    즉 양질의 기사확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중소규모 수준 혹은 그 이상의 재산을 가지고 어릴 때부터 기마생활에 익숙한 그런 계층이 양적으로 많아지는 것이 주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당의 전성기까지는 이러한 틀이 균전제의 시행 하에서 잘 지켜졌습니다. 즉 중소자영농들과 상층 양민들이 어느 정도의 안정적 기반을 균전의 지급을 통해 보장받으면서, 거기서 나오는 무장력으로 마필을 마련해 경험을 쌓거나 무기를 자생마련하는 체제가 잘 굴러갔던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현종시기에 가면 균전제의 유명무실화에 따른 대토지소유의 집적과, 중소자영농층, 상층 양인층의 위기로 이어지면서 양질의 기사를 자연스럽게 징발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마경험을 쌓을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을 가진 이들을 쉽게 확보하기가 힘들어지고 이를 모병으로 모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당 현종시기에 생긴 '확기(擴騎)'제의 성립은 그러한 기병뿐만 아니라 군대의 모집을 시정의 희망자에 한정해서 모집하는 모병제로의 전환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기사 양성의 특성상 이는 보병과 달리 단순한 모병제로만 해결될 수는 없는 것이었고 특히 질적으로 우수하고 경험이 노련한 기병을 징발하는 것은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송대에는 국가가 이러한 민간의 토지매매와 소유에 대해서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대토지소유는 더욱 확장되었으며, 이는 상대적으로 마필을 보유하고 승마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계층의 양적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3. 또한 이민족 기병의 경우, 사실 송은 당보다도 적극적으로 이민족 기병의 초치에 힘쓴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의 이민족 기병 동원이 도후부나 절도사에 소속된 제부락에 대해서 한시적 징발과 군사적 의무를 부과하는 성격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송의 경우는 '번병(蕃兵)'의 이름으로 공식화하고 상설적인 군 명목으로 만들기까지 했죠.

    그러나 지적해주신대로, 송의 이민족 기병 운영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문제는 송이 운영할 수 있던 이민족 기병 징발의 징집대상지역이 당에 비해서 한정되어 있었던 탓이 크다고 봅니다.

    당의 경우 대신라전쟁에서 대량의 거란족-해족 기병을 동원한 것이나, 황소의 난 진압과정에서 사타족 기병대를 적극적으로 초치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이들이 아직 통일된 정치공동체와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것에서 기인했습니다. 즉 분열된 이들 각 부족을 당이 분할통치하고 군사적 의무를 부과하거나 회유함으로서 이들을 징발할 수 있었던 것이었죠.

    그러나 당말, 그리고 특히 오대시대의 혼란을 거치며 이들 이민족 기병의 징집대상이 되어야 할 주요한 유목민족들이 통합된 국가단위로 결집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당대의 주요한 이민족 기병 공급원이었던 거란족-해족만 해도 야율아보기의 치세 하에 후량시기부터 국가체제를 정비해가고 있었고, 서북면의 이민족은 당항족의 영하부(寧夏部 : 서하왕국의 전신)에 의해 통합되어가면서, 후당 명종시기에는 중국의 지배에서 사실상 벗어나는 양상에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중국에 대한 자신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이들은 종전처럼 중국 조정에 자신들의 부락민이 번병으로 근무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규제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다음 파트에서 상술하겠지만 중국에 말 자체가 유출되는 것에 대해서 극도의 경계심을 보였습니다.

    (물론 안사의 난 당시에 회홀의 경우처럼 통일된 국가단위로서의 이민족 기병원군을 끌어올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은 중국의 통제 하에서 개인적-부락별로 징집된 이민족 기병들과 달리, 보다 규모의 통합된 정치적 체계와 단결 속에서 자신들이 가진 힘을 잘 자각하고 있었고, 이는 중국 조정의 통제에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거부할뿐더러 다대한 댓가를 요구하는 양상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회홀이 전쟁참여와 기병공급의 댓가로 탈환된 수도에 대한 약탈권한을 요구한 것은 유명하죠.)

    애시당초 이민족 기병만으로 기병수요를 모두 충당할 수는 없지만, 결국 송대에 들어서면 이민족 기병을 초치할 수 있는 절대적 범위가 적어진 샘이었습니다. 실제로 송이 징발할 수 있었던 '번병'의 대다수는, 토번제국의 붕괴 후 통합된 정치체제가 부재하였던 서번(西蕃)의 제부락, 즉 티벳고원 출신이었다는 데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봅니다.


    4. 더욱이 가뜩이나 당말서부터 나타난 이런 문제에 비해서, 송대의 중국에 악재로 작용한 것은 마필 공급지의 상실이었습니다.
    즉 후한대부터 주요한 마필의 공급지였던 하서회랑(현 감숙성 지역)은 후당시기에, 음산산맥 지역(연운 16주로 대표되는)은 후진시기에 각기 이민족의 손에 넘어갔는데, 이는 송의 성립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자연적으로 방목을 통해 마필을 사육할 수 있는 주요산지인 이들 지역이 줄어들고, 남은 지역은 농경중심지역으로서 마필 사육지와 경작지가 경쟁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지역으로서, 이런 지역에서의 마필사육과 기병양상은 보다 고비용을 요구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해외에서의 적극적인 마필구입을 통해서 이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실제로 송은 그렇게 했습니다. 잘 알려진 '차마고도'의 바탕이 된 교역로도, 송대에 국가가 차를 전매하면서 그 차를 티벳-운남에 팔고 마필을 수입해오던 경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죠.

    그러나 이러한 티벳-운남에서의 마필 수입은 노정의 험난함, 장거리라는 점에서 운송비가 더 많이 드는 사업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틴 반 크레펠트 교수가 지적했듯이 전근대 전쟁에서 가장 많은 물자의 소모와 수송량을 차지하는 것은 말의 마초공급문제인데, 티벳-운남에서 중국 내지로, 다시 이를 하북의 주요한 군사 제진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이러한 마필을 유지-운송하는 비용이 소모되었을 뿐더러, 마필의 피로로 인한 상실분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더욱이 남송시대에는 주요한 전장이 양자강 중~하류지역으로 이동해가면서 운송경로는 더욱 길어졌을 뿐더러 덥고 습윤한 기후로 인한 마필의 피로증가와 상실은 가중화되었죠.)

    물론 티벳 이외의 국가에서도 마필을 구입하는 길이 있습니다만, 티벳 이외의 말을 팔 수 있는 주변 유목지역들은, 거란과 서하에 의해 통합되어가고 있었고, 전술한 바와 같이 이들은 송에 대해서 마필을 공급하는 것에 크나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란의 경우 말뿐만 아니라 소-양과 같은 가축 자체를 송에 수출하는 것을 국법으로 금하고 있었고, 서하의 이원호는 말을 수출하는 것이 중국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을만큼 이들 국가는 송에 대한 마필의 수출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었습니다.


    5. 결국 이러한 양상에서는 기존 마필공급원의 생산량 감소+주요산지의 상실+ 마필 및 기사의 외부유입원 제한이라는 악재가 여러가지가 겹쳐져, 절대적인 마필의 확보 자체조차도 확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북송 전성기인 태종시대에도 명색이 중앙금군으로서의 '시위마군사(侍衛馬軍司)'조차도 정원의 1/3이 보졸로 편성될 정도의 극악한 상황을 낳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숙련된 기사의 양상은 오랜 시간과 훈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돈을 들인다고만 해결될 수가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주요하고도 시급한 해결책은 일단 절대적으로 부족한 마필부터 어떻게 마련해보는 것이 급선무였죠.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여러 대응책이 제기되었는데, 왕안석의 신법시기에 나왔던, 마필의 민간위탁관리정책인 보마법(保馬法), 남송시대 최여지가 주장한 만마사(萬馬社)의 설치등은 종래 국영목장 체제가 가진 비효율을 극복하고, 민간차원에서 승마의 경험을 가진 이들을 자연스럽게 양성하며, 민간에서의 성의있는 관리를 통해 양질의 마필을 생산하려는 정책이었지만....이런 정책들은 민폐를 유발한다는 강력한 반론과, 반대당파의 정치적 공세로 인해 항구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6. 명대에 들어오면, 기병양성에 있어서 중국은 다시 유리한 상황에 서게 되는데, 원-명 교체시기에 명이 하서회랑-음산산맥의 주요한 마필산지를 건국과 동시에 함께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토쿠스 테무르 사후로 몽골-여진족이 종전만큼 강력한 정치적 결합체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됨으로 인해 이민족 기병의 충원이 보다 용이해졌다는 ‘외부적 상황의 변화’가 존재했습니다. 더불어 명대에는 왕안석의 보마법이 의도하던 마필의 민간위탁관리가 비교적 넓게 확산-시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명대에는 중국이 양질의 기병을 비교적 확보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론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와 같은 명말 지식인들은, 이러한 명대의 마필위탁관리제도가 송대만큼이나 민폐가 되는 것이었다며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ㄷㄷ)

    결국 한-당 시기로 대표되는 종래 사회의 변화로 인한 기사 담당층의 축소와 기존 마필공급의 감소추세, 외부적 상황의 불리해짐 등이 송대에 맞물렸다가, 명대에는 외부적 상황의 불리가 어느 정도 극복되고, 민폐를 감수하고서라도 마필을 양성하려는 국가의 적극책 등이 이러한 문제를 비로소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상이 제가 인지님의 질의에 대해서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답변인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많은 부분은 2차사료에 의존하거나 혹은 이전에 1차사료에서 읽었던 기억에 대한 파편적 기억에 의거하고 있는 만큼, 이상하거나 틀린 부분이 있다고 느껴지신다면, 아낌없는 질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 홍어돋네 2011/05/02 17:27 # 삭제 답글

    어이구 이젠 하다 못해 川陝이란 새지명을 아예 창작하시네?
  • 들꽃향기 2011/05/02 20:01 #

    창작이라니요 ^^ 이부분에 있어서 제가 2차사료(논문 인용문)을 보고 1차사료(송사 원문)을 비교 검토해보지 못한 것은 실수이긴 합니다만. '川陝'이란 지명이 '창작된 새지명'이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놀랄 따름입니다.

    1. 우선 제가 해당 파트를 참고한 것은 김용완 선생님의 「南宋時代의 南渡人에 關한 硏究 : 高宗代의 軍事的 役割을 中心으로」, 충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97쪽에서였습니다. 거기서 인용을 해가면서, 주석에 원문을 "今國家之兵, 東至淮海, 西至川陝, 殆百餘萬"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하였기에 의심없이 받아들여 제 글에도 썼던 것이죠.

    그런데 지적을 받고 검토를 해보니, 원문에는 "方今國家之兵, 東至淮海, 西至川蜀, 殆百餘萬"이라 되어있군요. 이 부분에 있어서 제가 김선생님의 논문에서의 인용문을 그대로 믿은 것은 잘못이지만, 님에게 있어서 '창작'이란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여튼, 이 부분은 수정토록 하고 지적 자체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2. 한편 '川陝'이란 지명이 '아예 창작된 새지명'이라고 파악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놀랄 따름입니다. 남송시기에 있어서 사천지방과 섬서 남부지역을 총괄하는 직위가 있어왔고, 이를 川陝의 담당 관리라고 칭하던 것은 흔한 일입니다.

    이러한 '川陝'의 용어의 용례가 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새지명의 창작"인지는 해당 용례를 참고해보시고.(http://hanchi.ihp.sinica.edu.tw/ihpc/hanjiquery?@5^1577410104^22^^^3@@509335829)

    이런 문제 때문에 김선생님도 '천촉'을 '천섬'으로 오인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 있어서 김선생님의 실수를 그대로 검토 없이 수용한 것은 잘못이지만, '천섬이라는 지명이 아예 창작된 새지명'이라는 해괴한 논의까지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 무전신현 2011/07/01 17:40 # 삭제 답글

    님하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로 퍼가겠습니다.

    출처는 확실히 밝히겠습니다 ^^
  • 들꽃향기 2011/07/01 17:42 #

    아. 부족한 글에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추정'이라는 점은 밝혀주시면 역시 감사하겠습니다. ^^
  • 진전행촌 2011/07/19 14:29 #

    퍼갈려고 했는데 제대로 안붙여져서 ㅋㅋㅋ;;
  • morgoth 2012/01/06 00:09 # 답글

    송사에 관련해서 추천할 만한 책들좀 소개해주세요. 저희 집안이 송나라 황제 후손이라서 제가 관심이 많아서요.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보고 있는데 이번에 한번 전문적으로 깊게 들어가보려고 합니다^^ (제 본관이 배천조씨라서 시조가 태조 장남 조덕소 아들이라 런지 다른 중국역사들 보다 끌리더라고요.)
  • morgoth 2012/01/06 00:27 # 답글

    그리고 송서 번역된거 보내드릴수 있나요? 아직 어려서 한문으로 된거 읽기에는 무리인듯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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